윌은 왜 숀의 “It’s not your fault”를 듣고 울었을까
나의 인생영화는 줄곧 이 ‘굿 윌 헌팅’이었다. 쇼생크 탈출을 보게 된 이후에는 둘 중 어느 영화가 더 나에게 감명을 줬는지 때때로 재밌는 고민을 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정말 어쩌다 보게 된 이 영화는 당시 나에게 전에 없던 울림을 줬다. 이후에도 삶을 살아가며 다른 경험들이 쌓이고, 스스로에 대해 몰랐던 면에 대해 더 알아가고 하면서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은 조금씩 달라지기도, 더 그 감동의 크기가 불어나기도, 또 그때는 별 감흥이 없던 부분에 대해서 다시 보게 되기도 했다. 문학작품 ‘어린 왕자’에 대하여 읽는 시기에 따라 감상이 달라진다고들 많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나에게는 이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가 그래왔다. 비록 영화를 처음 보고 지금까지 흐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정말 별게 없었다. 사실 수학이나 과학 쪽에 관심이 별로 없어서, ‘문제아이지만 굉장한 수학적 재능을 가진 소년의 우당탕탕 성장기’라는 설명을 들었다면 아마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 영어 공부에 관심이 있었고, 우연히 형이 영어 과거에 샀던 굿 윌 헌팅 영어공부용 대본 책을 집에서 발견했다. 그래서 영어 공부도 이 책으로 해볼 겸, 큰 기대 없이 이 영화를 봤다. 그런데 우연히 보게 된 이 영화 때문에 가슴이 너무나도 먹먹해져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까지 정말 숨죽이고 화면을 봤다.
당시에도 숀 교수가 윌에게 “It’s not your fault”라는 짧은 말을 반복하는 씬에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사실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뽑는 장면이고 나와 같이 울음을 터뜨린 사람도 정말 많을 것이다. 근데 사실 나는 그때만 해도 머리로는,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이 대사가, 이 장면이 가슴 깊이 박혔는지. 단순히 문학이든 영화든 작품을 보며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라서 그랬을까? 내심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그냥 내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이유가 뭐 그리 중요할까 싶어 이에 대해 깊이 탐구는 더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 이 영화는 내게 인생영화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취미로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 책은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 문학 작품도 좋아하고, 또 심리학, 정신의학 쪽의 책을 좋아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 이런 저런 경험들을 더 하고, 괴로운 자아탐구의 시간을 가지며 알게 되었다. 내가 바로 회피성 성향이 매우 강한 인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이입이 되었던 것이다. 윌 헌팅에게 말이다.
처음 이 영화를 봤던 시기에는 윌과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윌처럼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가진 천재가 아니다. 그게 수학이나 과학 분야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나는 윌처럼 어렸을 때 가정학대를 당한 경험도 없다. 그래서 그냥 그런 표면적인 특징들만 보고 스스로 윌에게 내가 왜 그토록 이입했는지 이유를 잘 못 찾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이성의 경우이고, 나의 마음은, 감정은 달랐다. 본능적으로 윌이 나와 어떤 면에서는 동족임을 알고 있었다.
회피형 애착, 회피성 성격 장애, 회피형 인간… 내가 전문가가 아니기에 나를 정확히 무엇이라 진단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스스로 자신이 이쪽 계열에 속한다는 것은 심리학에 대해 공부하며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에 대해 근원적인 수치심을 자기고 있다 하더라.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찔려서 너무 슬펐던 그 감정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내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 내가 부적절한 인간이라는 느낌. 나도 원치 않게 스스로에게 가져버린 인식. 이 자아상은 어쩌면 나도 잘 의식하지 못하게, 내 마음 저 구석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라서, 이성적으로는 다른 판단을 할 가능성도 있는 것 같다. 나는 ‘이제는 어렸을 때 상처에서 벗어나 성숙한 자아상을 확립해야지’하고 연습을 많이 해봤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진정으로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 불편한 수치심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충분히 괴로워도 해보고, 끝내 위로도 해주며 해소하지 않는 이상 이 부정적인 자아상은 내게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마주해야 할 수많은 욕망들을, 갈등들을, 감정들을, 관계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도망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러면 안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도망을 간다.
윌은 대학교에서 청소부를 하면서도 복도에 걸린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본다. 그는 자신의 재 능을 발휘하고 싶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도망간다. 거기 서보라는 램보 교수의 말에 ‘저는 이 문제 풀 줄 아는데요’라고 말하지 않고, 등을 돌려 도망을 간다. 램보 교수가 시도한 수많은 심리치료에서도 그렇다. 그는 치료자들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일도 일절 하지 않고 도망친다. 또한 자신의 애인 스카일라로부터도 도망친다. 윌 같은 사람들은 상대의 잘못을, 결점을,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 않고 도망칠 이유를 끊임없이 찾으며 자신과 상대방의 진심을 외면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자신은 공사장에서 일할 것이라며 자신의 재능과 진짜 욕구를 외면한다. 윌은 똑똑하다. 그래서 항상 그럴싸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이공계 쪽의 일을 하지 않고 공사장의 일을 하는 것은 ‘공사장에서의 일이야 말로 충분히 숭고하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고, 스카일라를 떠나는 이유는 ‘자신에게 스카일라가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고 매 심리치료를 받지 않았던 이유도 그때 그때 이유들은 가지각색이다.
하지만 그 그럴싸한 이유들이 결국은 회피성 성향이 강한 소년의 핑계인 것을 숀은 꿰뚫어 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무례했던 소년 윌과 벤치에 앉아 지적한다. 너는 매우 똑똑해서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세상에 대해 다 아는 듯이 굴지만 그건 머리로 아는 지식일 뿐이라고. 직접 가본 곳도, 직접 본 예술 작품도 없고, 훗날 아플지라도 그만큼 기쁨을 주는 사랑을, 그런 깊은 관계를 해본 적도 없는 방어기제 심한 애일 뿐이라고. 지식은 많지만 직접 체험하고 느끼고 깨달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고. 정곡을 찔린 윌은 처음으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한다. 나 또한 지금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하면 정곡을 찔린 기분이다. 나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공부를 얼마나 했던, 하고 싶었던 일을 얼마나 시도해보던, 관련 심리학이나 철학 책을 몇 권을 읽었던 나는 정작 중요한 일 앞에서는 도망가기 바빴던 텅 빈 인생을 산 것 같다는 자괴감이 최근에 들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 장면 이후에도 윌의 수많은 도망은 계속된다. 대신 숀과 윌의 관계는 진전되고, 그들의 대화도 계속 된다. 그러다 결국 치료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등장한다. 숀은 윌의 불우한 어린시절, 가정학대를 당했던 과거를 짚어낸다. 어색하게 센척하며 ‘맞아요. 그게 뭐요’라는 식으로 응하는 윌에게 숀은 말한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애써 또 담담한 척 ‘알아요’라고 하지만 숀은 멈출 생각이 없다.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듯 저 말을 윌에게 반복해서 전해준다. 위로의 말임에도 윌은 화를 내게 된다.
“알아요! 선생님이라도 좀 냅두시라고요!”
처음 영화를 봤던 때부터 윌이 어떤 심정으로 저런 대사를 하는지, 저 절규의 의미가 무엇인지 마음으로는 알았던 것 같다. 그 가정 학대가, 어린 시절의 상처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닌 것을 그 똑똑한 윌이 정말 모를까? 논리적으로는, 이성적으로는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은 아니다. 윌의 자아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스스로 어린 시절 나는 문제가 있다는, 뭔가 부적절 하다는,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자아 정체감을 형성했을 것이고, 계속해서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을 것이다. 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한 말에도 절규하며 화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숀은 멈추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 멈춰 고통스러운 윌의 자아에게 계속해서 말해준다.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제서야 윌은 솔직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린다. 누구에게도 쉽게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지 않던 그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숀을 끌어안는다. 일반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비상한 두뇌,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반항적인 태도로 가려져서 그렇지 윌의 상처입은 자아는 연약한 소년일 뿐이었다.
실제 회피성 성격을 개선하는 데에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이러한 왜곡된 자아를 마주하고, 자기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한다. 무턱대고 나약하게 피하지 말라는 것은 핵심을 배제한 개선 방법이라는 거겠지. 사실 스스로의 이런 그림자를 마주하고, 자기 자신의 솔직한 욕구와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안해본 사람에겐 무척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해보니 정말 괴롭기도 하고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또 그만큼 한 걸음씩 해낼 때 편안해지고 후련해지기도 한다. 마치 윌이 처음엔 숀의 말을 듣고 화내다가, 눈물을 흘리며 감정을 해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후에 윌은 어떻게 될까? 당연히 마냥 꽃길만 걷지는 않을 것이다. 때때로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부정적인 자아상은 또 고개를 내밀 것이고, 어려움 앞에 이따금씩 다시 도망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이전과 같지는 않을 것 같다. 계속 발전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벌써 척의 조언을 듣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을 했고, 용기를 내 스카일라를 다시 잡으러 갔다.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고 결코 완벽해질 수 없는 우리네 삶의 궤적에서 윌 또한 계속해서 여러 실수들을 반복하겠지만, 용기를 내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It’s not your fault”라는 이 마법 같은 말을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또 원치 않게 수치심을 가지고 애써 살아가는 수많은 윌 헌팅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축복의 마음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