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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녘 Dec 19. 2024

<내게 무해한 사람> 中 <모래로 지은 집>에 대하여

모래는 왜 나비를 떠났을까

 처음 최은영 작가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날짜까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2020년 어느 추운 날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군 복무 중이었고, 군대 안이라고 다를 것 없이 각종 희로애락을 느끼며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중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치고, 때론 자신에 실망해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에 이 책을 발견했다. 당시 나는 마음이 힘들면 조용한 독서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추스리고는 했다. 그러던 날 중 어떤 하루, 노란 색의 예쁜 표지, 어떤 문학적 함축성이 있을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제목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날 때 마다 손에서 놓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는 소장까지 하고 있다.


 최은영 작가의 글은 심장을 후벼 파는 속성이 있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그러다가 어떤 이유로 어떤 타이밍에 실망하는지,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고 빛나고 다시 꺼지는 지, 서서히 꺼지는 건 어떤 형태이고 갑작스레 꺼지는 건 어떤 형태인지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이 글을 쓴다. 이런 관찰력은 가진 당사자가 너무 힘든 순간들이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써는 정말 엄청난 재능이 아닐까 싶다. 이후 <쇼코의 미소>를 비롯한 다른 단편집도 찾아 읽기 시작하며 그녀의 팬이 되었다. 우울하고 아프고 섬찟하지만, 인간은 사실 자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사랑하나 보다. 나는 작가의 그런 이야기들 속에 빠져 때론 이입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결국 치유 받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었음에도 내가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단편집은 <내게 무해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모래로 지은 집>과 <아치디에서>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모래로 지은 집>이다. 이 단편집의 이야기들은 다 관계의 멀어짐을 이야기한다. 나에겐 일곱 이야기의 일곱가지 멀어짐 중 <모래로 지은 집>의 이별이 가장 충격적이었고, 아팠고, 인상적이었다.


 나비, 공무, 모래는 20대 초반이라는 불안정하고 서툰 나이에 만나 청춘을 나눴다. 으레 그렇듯이 세 인물에게는 각자 다른 불안과 아픔이 있다. 이들은 어떤 아픔은 서로에게 꺼내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아픔은 등 뒤로 안 들키게 감추기도 한다. 서로의 아픔을 보고 때로는 자신의 그것에 비추어 공감하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기도 한다. 서로 많이 다르지만, 그 다름을 이해하기에는 자신의 아픔이 언제나 결국엔 더 커 보여서, 때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게 무척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지만 이들의 관계는 계속해서 아슬아슬하게 비춰진다. 그런데 그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관계의 끊은 갑자기 툭 끊어진다. 갑작스레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 모래를 통해서 말이다.


 해당 단편은 나비의 시선에서 서술된다. 나비의 시선에서 모래는 셋 중 가장 의존적이고, 유약하고, 따뜻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데 그런 모래의 결심으로 인해 셋의 관계는 끝난다. 나비의 집에서 나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편지를 두고 떠난다. 그 편지가 이별 편지였기에, 떠난 모래는 나비와 공무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첫째로는 셋 중 다른 누구도 아닌 모래가 이별을 결심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까지 사랑한다고 하고는 떠났다는 것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모래의 편지를 열어본 나비에게 많이 이입됐나 보다. 막연한 두려움에 그 편지를 바로 열어볼 수 없어 하루가 지나서야 편지를 열어본 나비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이별을 예감하고 이별을 마주하는 순간까지의 묘사가 끔찍하게 생생하다.


 나에게 이 단편의 하이라이트는 모래의 편지다. 편지에는 모래의 자기혐오, 나비와 공무를 향한 사랑, 실망, 미안함의 감정들이 절제된 문장들 속에 절절히 묻어나온다. 모래는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이 편지를 읽으면 모래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만 같다. 모래가 미국으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하는 것과 별개로 왜 이별까지 암시하는 글을 썼을까? 이들의 관계 사이의 감정의 폭이 얕았다면 굳이 이별까지 하고자 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느슨한 관계였다면 계속 느슨한 채로 유지될 여지를 남기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어떤 이별의 경우는, 사랑하는 마음이 다 떨어져서 찾아오지 않는다. 너무 사랑해서, 거기서 오는 폭풍같은 자극들을 견디지 못해 생겨난다.


 모래는 편지를 통해 나비에게 “너는 네가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람이었는지 상상하지 못할거야. 그 사실이 항상 기쁨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이라고 한다. 둘은 친구로써 서로를 사랑했지만 그 가까운 거리에서 어긋남이 많았다. 모래처럼 다소 의존적인 인물에게 나비가 자신에게 큰 사람이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 사람의 말 한마디가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서, 단순히 애정과 관심을 넘어 일종의 인정까지 받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비는 모래에게 때론 쉽게 판단하고 질책했다. 아마 그래서 이에 연연하는 것이 큰 고통을 낳지 않았을까 싶다. 이건 나비의 자기 연민 때문이기도, 자신의 일부만을 드러내 보여준 모래 때문이기도 하다. 


 모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했다. 이를 편지에 담백하게 썼다. 자기 자신의, 또 자신의 삶의 어떤 일부는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벌을 주듯이 외면했다고, 하지만 그게 사라지지 않았다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생각처럼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은 이유이다. 모래는 계속해서 나비와 공무에게 사랑을 주고 싶었을 것 같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한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려 할 때는, 마음이 언제나 위태롭고 공허하다. 그래서 모래는 이를 언급하고 새 출발을 시작한 것 같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가득 채워보기 위해서.


 하지만 모래는 자신이 온 감정을 소진해 마음을 줬던 관계에는 안녕을 선언한다. 어쩌면 서툴어도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별을 받아들이고 괴로워하던 나비도 이 이야기를 회상하는 서른 다섯에는 더 이상 그만큼 아파하지 않는 듯 하다. 이별 후 인물들이 괜찮아졌다고 해도 독자가 휴유증에 시달릴 수 있는 것은, 비슷한 경험을 삶에서 하게 되기 때문 아닐까. 나도 때론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 따뜻한 마음을 제 때 꺼내 보여주지 못한 나비이기도, 때론 실망에 지쳐 떠난 모래이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Pixabay)


 눈을 감는 날까지 끈끈하게 유지되는 관계들도 있다. 하지만 한 시절에 정말 소중했던 관계였음에도 어긋나고 찢어지는 것들이 있다. 우리 삶이 각자가 가는 길에서 서로 겹쳤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기 때문이겠지. 그게 서른 다섯이 된 나비의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시니컬한 말이나, 제목인 ‘모래로 지은 집’처럼 허무한 것일까. 솔직히 그렇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이 끝이라는 아픔의 순간까지 모든 과정을 소중히 하기에 이 단편집이 그토록 인기가 많았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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