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한 두 사람 잡고 사는 거야 인생이. 왜 설명 없이 나를 알아주는 인간들 있잖아”
가수 양희은 씨가 미디어를 통해 했던 말이다. 유튜브 숏츠 영상을 보던 중 우연히 접한 말이었는데 당시엔 좀 강렬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금방 잊고 살던 말이었다. 그런데 영화 <룩백>을 다시 회상하던 중 문득 생각난 말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것은 좋지 않다는 메시지를 많은 현대인들이 접하고 살지만, 또 그렇다고 전혀 휘둘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협력이 필수적이었고, 따라서 배척 받으면 굉장한 위기로 인식해 고통스럽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물론 현대사회의 모습은 고대 인간사회와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따라서 타인의 시선에 굉장히 민감한 본능을 어느정도 잘 다루고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메시지가 나오는 것일터다.
하지만 역시 뭐든 극단은 좋지 않다. 요즘에는 ‘인생은 혼자다’, ‘관계는 다 부질없다’ 이런 극적인 메시지들까지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타인에게 휘둘리지 말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자기 자신의 영역을 잘 지키라는 뜻이지, 관계 자체를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충만함과 기쁨, 의미들이 있다고 믿는다. 정작 나는 여전히 많이 서툴고 겁도 많지만, 그 가치를 믿고 있다. 사회적 동물이기에 이는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진 않은 것 같다. 정말 나의 삶에서 중요한 사람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아도 될 지 모른다.
극 중 쿄모토는 어떻게 보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학창시절을 집에서 고립되어 보내고 있던 캐릭터로 추측된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솔직히 그림이 없었다면 정말 많이 힘든 시기였지 않았을까 싶다. ‘극단적’ 고립이 한 인간의 삶에서 주는 정서적 영향은 그리 좋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쿄모토에게는 삶의 의미가 있었다. 그림이었다. 이건 사실 쿄모토에게 내재해있는 창작이라는 본능을 넘어서 어쩌면 어린 나이의 쿄모토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림이 지탱해주던 쿄모토의 삶은 후지노를 만나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함께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리고, 아이디어를 나누고, 번화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그런 일상들… 쿄모토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쿄모토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데는 그리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딱 후지노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성장 곡선에서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고민하고, 정서적으로 의존하던 대상에서 독립해 자신의 색을 펼치고자 하는 시기가 온다. 쿄모토는 자신의 그림 실력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후지노와 떨어져 미대를 가는 방향을 택한다. 방에서 혼자 그림 그리던 시간, 후지노와 함께한 많은 시간을 지나 쿄모토는 또 새로운 자신의 세상을 열고자 한다. 근데 이 때 오히려 후지노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으레 그 나이대가 그러기도 하듯, 마음에 없는 소리로 자신의 진심을 가리는 실수를 한다. 아마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니가 나와 떨어지려는 시도를 해서 아쉽고 섭섭하다는 솔직한 이야기 대신, 나 없이 니가 잘할 수 있겠냐며 타박을 한다.
쿄모토에게 후지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한 두 사람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이는 분명해 보인다. 근데 사실 사회성이 좋은 후지노에게도 쿄모토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일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 그 가치를 유일하게 알아봐줬던 사람. 꿈을 포기하려고 했던 문턱에서 자신을 끌어올려줬을 때부터(쿄모토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후지노에게 쿄모토의 존재는 줄곧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후지노는 당연하듯 그림 외 많은 것이 서툰 쿄모토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양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정서적으로는 자신이 쿄모토에게 더 의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전에 리뷰했던 단편소설 <모래로 지은 집>에서도 비슷한 관계의 양상이 나온다. 나비는 유약한 모래가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이 나비에게 더 의존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모래로 지은 집>, <룩백> 이 두 작품을 리뷰하며 그런 생각이 든다. 누가 누구에게 더 의존한다는 것은 때론 얼마나 오만한 착각인가. 그 착각이 준 믿음을 잘 돌아보지 않으면 결국 가장 후회하는 것은 자신이 되지 않을까?
쿄모토의 미대 선택 이후, 영화는 시간이 흘러 만화 작가가 된 후지노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시점의 후지노는 쿄모토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 흐르는 시간동안 쿄모토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풀어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에서 보여준 관계의 결말은 쿄모토의 부고 소식으로 인한 쓸쓸한 이별이었다.
이후 후지노는 쿄모토를 밖으로 부르지 말 걸 후회한다. 그랬다면 쿄모토가 이런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고. 하지만 내 생각에 쿄모토는 아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쿄모토에게는 그림이라는 삶의 이유도 당연히 큰 의미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세상을 후지노를 통해 만났을 것이라 본다. 비록 자신의 다음 스텝을 위해 미대, 그리고 후지노와의 멀어짐을 선택했지만, 쿄모토에게 그 시절 자신의 삶의 가장 큰 부분은 어쩌면 그림보다 후지노와 보냈던 수많은 추억들일지도 모른다.
우리 인생의 비극과 변수는 애석하게도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불안 한가운데서 느낄 수 있는 관계와 경험이야 말로 바로 삶의 의미들일 것이다. 비록 안타까운 사고로 자신의 재능을 더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쿄모토가 후지노를 따라 밖으로 나왔던 시간을 그렇게 느끼기를 바래본다. 후지노 또한 이를 믿고 자신의 잘못이 아닌 부분들을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작품의 남은 여백들은 이런 개인적인 바램과 상상들로 채워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