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와상 생지를 와플 기계로 눌러서 만든 디저트가 크로플이었다. 크로와상+와플을 조합한 말이군. 크로와상 생지를 그대로 사용한다면 모양만 다를 뿐 똑같은 거 아닌가?
같은 걸로 보긴 어렵다는 걸 검색하면서 알았다. 오리지널 와플도 여러 변주가 있듯 크로플에도 수많은 변주가 있었다. 디저트 전문 카페에 버젓이 정식 메뉴로 올라와있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들었던 의문, 이렇게 할 거면 와플과 크로플의 차이점이 있나? 와플 기계에 들어가기 전에 크로와상 생지였는지, 와플 반죽이었는지 인증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거 같은데?
삐딱한 생각을 하며 폰에 뜬 사진을 들여다봤다. 와플이든 크로플이든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듯한 생생함이 액정을 뚫고 나와 ‘이래도 안 먹고 싶니?’ 하며 내게 말을 걸었다.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것으로 사람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했던가. 그 아름다운 장면에 아름다운 디저트도 포함해야 할 거 같았다. 무슨 맛인지 짐작이 가는데도 그 아름다움을 실시간으로 보며 먹고 싶은 마음, 아마 디저트 카페가 유행하는 가장 큰 이유이겠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우와, 이거 정말 새로운 아이디어야! 했던 것도 찾아보면 이미 다 있다. 물론 애플의 잡스처럼 세상에 없던 스마트폰을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기는 하나 그런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롭다고 생각하는 건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크로플의 아이스크림이, 슈거파우더가, 블루베리가 그렇다. 다 있던 거 아니냐고? 있었다. 와.플.위.에. 지금 내가 사진으로 보고 있는 것들은 크.로.플.위.에. 뿌려진 것들이다. 맛도 짐작할 수 있고, 모양새도 완전 새로운 건 아닌데 다시 돌아보고 찾게 되는 이유는 뭘까.
정성이었다. 잡스의 스마트폰처럼 완벽하게 새로운 건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해 단 1프로의 새로움을 만드는 것, 그 정성이 전해져 새롭지 않은 것이 새롭게 다가왔고 크로와상과 크로플이 (태생은) 같지만 다른 디저트가 되고 있었다.
뭔가를 쓰는 걸 좋아하는 나였지만 쓰고 나서 ‘이건 남들도 다 하는 얘기잖아’하고 삭제를 눌러버린 적이 많다. 남들이 쓴 글을 보며 자괴감의 탑을 쌓았다. 냉정하게 보면 그랬던 글들 역시 크로와상 크로플이었다. 단지 얼마나 더 정성스럽게 보고 쓰느냐의 차이일 뿐. 그 작은 차이가 새로움을 만들었는데 나는 무조건 ‘그들의 새로움은 대단해’라고 하며 내가 가진 것은 무시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크로플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남이 아닌 나에게 집중하자고. 소셜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나에게 집중하는 건 거의 훈련의 영역으로 갈 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더 내게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 정성을 ‘기존 거에서 모양만 바꾼 거잖아!’라고 비하하지 말아야 한다. 와플기에서 모양만 바꾼 크로와상 생지가 새로운 디저트가 되었듯 내 안에서 이리저리 모양을 바꾼 그 어떤 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십 년 간 아이를 열심히 키웠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 된 요즘이다. 벗어나보려 이리저리 애쓰지만 쉽지 않음을 자주 확인할 때, 크로플은 달콤한 위로가 된다.
그 위로를 받아 하루를 정성스레 돌보려한다. 그 정성의 힘으로 1프로의 새로움을 찾으면 내게 알맞은 시간이라 칭하려 한다. 나의 삶이 <알맞은 시간>이라는 구문 위에서 안온해지길. 커피와 함께 하는 크로플이 고마워지는 날이다.
내일, 아코더 작가님은 '깻잎’ 과 ‘상추’ 사이에 선을 긋습니다. 모호한 경계에 선을 긋고 틈을 만드는 사람들! 작가 6인이 쓰는 <선 긋는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