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 존재하는 날 vs 힘껏 존재하는 날

골프장갑

by 음감

골프는 왼팔로 치는 거란다. 왼손만 장갑을 끼고 왼팔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뻗는 게 중요하다나. 골프 극초보를 벗어나면 왼팔을 구부리는 스킬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지금까진 그렇다.


아무리 극초보라도 장갑은 있어야 한대서 이마트 장갑을 샀다. 장갑을 끼니 뭔가 내가 멋있어 보인다...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20미터 치면서 굳이 장갑까지?라는 생각을 했다.


똑딱이 연습(스윙 없이 시계추처럼 채를 움직여 공을 치는 것)을 지나 하프스윙까지 했더니 장갑의 검지쪽이 밀려서 너덜너덜해졌다. 아니, 내가 몇 번이나 했다고 벌써 이럼? 하면서 보니 골프 장갑은 마찰력 때문에 손에 완전 딱 맞아야 한단다. 설상가상으로 장갑을 안 낀 오른손 검지 손가락 아래는 뭐가 자꾸 걸리적거린다. 으헛. 살이 벗겨져 양탄자처럼 돌돌 말려 올라갔다.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나 오른손 장갑도 사줘.

“이따 센티 재보고 사자.”


“뭘 재. 그냥 제일 작은 거 사.”


새 장갑이 집에 왔다. 손바닥 전체에 실리콘 그물이 깔려있어서 채가 더 탄탄하게 잡힌다.




아침 첫 타임 레슨 받고 연습하느라 땀 흘린 후 쉰내 폴폴 풍기며 집에 가는 길. 완전 딱 맞는 장갑이 적어도 이 한 시간은 내가 대충 존재하지 않았구나 싶은 마음을 준다. 세상에, 그깟 장갑 하나가 뭐라고.


달리기는 땅에 발이 닿는 각도든, 달리는 자세든 다 대충 하면서 시간을(혹은 거리를) 채울 수 있는데 희한하게 이놈의 골프는 아무리 극초보여도 대충이 없다. 어드레스(준비자세)를 칠 때마다 확인해야 하고 치기 전에도 코킹(클럽을 들어올렸을 때의 각도)을 머릿속에 한 번은 그린다. 뭐 하나라도 대충 하면 여지없이 10미터도 못 가서 톡 떨어지거나 아예 공 자체를 맞추지도 못한다. 안그래도 집중해서 존재하는 참에 착붙 장갑으로 높아진 마찰력은 클럽 쥐는 힘이 세진 듯한 착각까지 준다. 이렇게 또 올라간 집중도. 뭔가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대충 달린다 해도 멈추지만 않으면 숨이 차니까 그 숨참으로 머릿속이 맑아졌다. 골프는 한 티도 대충 할 수 없어서 매번 집중으로 존재하니 그 역시 머리가 맑아졌다. 나는 집중한다고 했는데 공이 엉뚱한 데로 가버리면 욕이 먼저 나오지만 그마저도 집중의 일부 같았다.


너무 다른데 너무 비슷한 집중이 좋아서 일단은 더 가보기로. 극초보는 벗어나 보기로. 내가 얼마나 집중적으로 존재하는지, 풀스윙을 해도, 헤드가 뚱뚱한 저 채를 써도 집중적 존재가 되는지 더 가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