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말, 남친(지금의 남편)은 경기도로 놀러 가자고 했다. 본인 아빠 차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토요일 아침, 약속시간보다 40분이나 지나 도착한 남친은 방금까지 야근을 한 밤 11시의 얼굴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지 5분 만에 알았다. 그가 종종 했다는 운전은 뻥 뚫린 고속도로 직진 운전이었고 서울 시내 운전은 그날이 처음이었음을.
그랜저 에어컨은 시원스레 잘 돌았고 차선을 못 바꾸는 그도 돌아버리는 게 느껴졌다. 당시 나는 운전하면서 하루에 열 몇 집씩 피아노 레슨을 했다. 만일 첫 집에서 5분 늦으면 마지막 집은 근 1시간이 늦게 끝나는, 그러니 나는 일부 택시가 위협적으로 끼어들어도 끝까지 버티는 깡있는 운전자였다. 더 바쁠 때는 칼치기도 불사했다.
이 모든건 나 혼자 있을 때나 하는 짓이니돌아버리고 있는 그에게“앞대가리를 들이밀어야죠.”라는 식의 말은 못했다. 나는 코스모스 같은 아가씨를 연기하고 있었으니까.(몸무게가 45kg일 때다)
얼마 후, 레슨 마지막 집인서초 아크로빌로 남친이 왔다. 나는 16년 된 아반떼에 그를 태웠다.우리는 삼호가든 사거리를 지나 반포대교를건너야 했다.
저녁 8시의 삼호가든 사거리는 코스모스를 유지할 여유가 없었다. 나는 본모습으로 운전했고 그는 두 손으로 창문 위 손잡이를 부여잡았다. 과묵해진 그를 보며 나는 웃음이 터졌고 코스모스 코스프레도 끝났다.
그 후로 그는 운전해서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말 따위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대신그가 술마신 날내가 데리러 갔다.
13년이 지났다. 어디가든 남편이 운전한다. 가끔 그가 말한다. “아니, 왜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꼭 내가 하는 거지?” 그럼 나는“엄훠, 저는 운전이 무서워효.” 라며 입술 끝에 엄살을 매단다.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푹 웃고 만다.
아이들을 태우고 삼호가든을 지나 반포대교로가던중이었다. 그날이 생각난 나는 낄낄대며 말했다.
"기억나? 내 차 처음 탄 날 이 근처에서 손에 핏줄 튀어나오게 손잡이 움켜쥔거? 그르케 무서웠쪄요? 으흐흐~"
남편은 "내가 겁이 많은게 아니고 당신이 과격한거지. 그렇게 하다가 벌금으로 차값 날려." 라고 대꾸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벌금을 그렇게 많이 냈어?” 라며 놀라워했고 나는 아빠의 뻥에 속지 말라고 했다.
초여름 햇살이 파삭하게 부서져 도로 위의 차량들을 모두 보석으로 만들어버리는 날이었다. 한강은 부서지는 볕을 알뜰하게 다 챙겨 자르르한 윤기를 내뿜었다. 낄낄대던 우리는 그 자태에 말문이 막혀 순간 정지화면으로 한강을 바라봤다. 남편이라는 세계가 가족이라는 세계로, 다시 자연이 주는 감탄이라는 세계로 넘나드는, 선물같은 어느 토요일이 그렇게 지나갔다.
내일은 캐리브래드슈 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 작가 4인이 쓰는 <남편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