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흔이 훌쩍 넘은 어느 날, 길석님이 넌지시 말을 했다.
“내 친구들은 부부끼리 골프 치러 다니거든. 니 남편도 골프 좋아하잖아. 너도 좀 배워. 난 골프치는 친구들이 부럽더라. 일흔 넘은 니 아빠랑 이제 와서 골프를 배울 수도 없고.”
남편은 골프 5년 차였다. 저 긴 채로 저 작은 공을 굳이 왜 맞춰야하는지, 저 쨍쨍한 필드에 굳이 왜 나가는지 이해 못했으나 내가 하는 거 아니니 별 말 안 했다. 길석님의 넌지시는 이제 나도 별 말 하게 했다.
길석님은 평생 본인의 바람을 내게 투영시킨 일이 없었다. 당신이 못한 걸 내가 하면 좋겠다는 건 길석님 일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길석님에게 차마 싫다 할 수 없어서 알았다고는 했으나 하지 않을 핑계를 창의적으로 창작하며 하루하루 미뤘다. 길석님은 다시 자본주의적 제안을 했다.
“너 그러다 절대 안 배우지. 이번 달 안으로 등록하면 내가 레슨비 내준다!”
길석님은 내가 그깟 돈에 휘둘릴 거라 생각했나보다. 역시 정확하다. 제대로 낭창낭창 휘둘린다. 통장에 꽂히는 현금은 치타가 목표물을 향해 뛰는 속도로 광클릭을 불렀다.
연습장과 레슨코치를 정하고 길석님에게 인증샷을 보냈다. 짧은 답이 왔다. “고마워 우리 딸” 아니, 결제를 하신 분이 왜 고맙다고 하십니까. 길석님이 앞에 있지도 않은데 괜히 머리를 조아린다.
길석님은 늘 “니네가 찌그럭거리지 않고 조용히만 살아도 효도야”라고 했는데 내가 골프를 시작하고서는 “니네가 공통 취미로 재밌게 노는 게 효도지.”라는 말을 했다. 골프가 효도가 되는 순간이었다.
코로나로 애들은 온라인 수업, 남편은 재택근무를 했다. 골프는 온 집안 식구가 종일 집에 있는 육중한 하루의 탈출구가 되기도 했다. 늪처럼 고여 있는 집의 오전 시간이 연습장에서는 장마철 강물처럼 눈 깜짝할 새 흘렀다. 나의 효도, 나의 탈출구, 나의 골프는 그렇게 시작됐다.
레슨 10회가 지나면서는 탈출구 지분이 커졌다. 골프 연습장에서의 시간이 꽤 빽빽했고 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전에도 밀도 높은 일은 많았다. 해도해도 끝없는 집안일, 내 맘처럼 안되는 아이들 일, 내 의지와 상관없는 코로나 시국 등.
밀도가 높으면 답답하다. 골프연습장의 밀도는 모든 게 본질을 향하기에 답답하지 않았다. 한 타를 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정확하게 좋은 샷이라는 본질에만 닿아있었다. 같은 빽빽함이라고 해도 오로지 본질을 위한 빽빽함은 묘한 위로가 됐다. 연습장에서의 시간이 그리 빠르게 흐른 이유도 아마 다른데 신경 쓸 일 없이 본질에만 집중하는 시간이어서 그랬을지 모르겠다. 이 시간은 골프가 가진 사치 스포츠라는 선입견 너머로 사람과 삶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기록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