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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04. 2021

레퍼런스, 내 퍼런 시절.

꼭 그렇게까지

영희는 분명 귀여운 수달을 보고 그렸는데 결과물은 무서운 뱀장어였어요. 전문용어로 똥손이지요. 영희가 다니는 음대는 미대 바로 옆건물이었지만 영희의 그림 감각은 옆 차원보다 더 먼 어드메로 날아간 상태였어요. 학창 시절 내내 영희보다 그림 못그리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영희가 하는 문화센터 수업은 어떤 교수님께 저작권이 있었어요. 그 교수님은 문화센터에서 쓸 유아용 새 교재를 만들겠다며 강사들을 소집해요. 영희도 갔어요.


영희는 교재에 들어갈 그림 레퍼런스를 맡았어요. 지금이야 이미지 찾기 쉬운 시대지만 20년 전에 영희가 생각하는 이미지는 도서관 일러스트 도안집이었어요.


대충 그려서 하라는 말도 있었지만 진짜 그려서 가니까 바로 빠꾸 맞았어요. 아마 그게 귀여운 수달에서 출발한 무서운 뱀장어였을 겁니다.


도안을 찾고, 확대 복사를 하고, 오려 붙여서 가져갔어요. 그랬더니 종이가 두꺼워져서 보기 불편하시대요. 오려 붙인걸 다시 복사해서 깔끔하게 만들어오래요.


아니, 이걸 그대로 쓴다는 게 아니고 레퍼런스잖아요. 어떤 분위기인지만 알면 되는거잖아요? 라고 할 깡이 스물다섯 아가씨에게는 없었어요. 그저 일이 하나 더 늘어날 뿐.


수달을 뱀장어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의 영희가 보는 눈이라곤 있었겠어요? 도서관 일러스트집으로 해결이 안되서 다른 책을 샀어요. 여기서 진행비 따위의 예산이 있으면 이상하겠죠? 영희 생활비에서 깠어요. 칼라 복사비로 하루에 2만원을 쓴 적도 있어요. 하한가를 치는 퍼런 주식 그래프마냥 영희 가계부도 맨날 퍼랬어요. 그놈의 레퍼런스를 퍼렇게 두들겨패고 싶었어요.


영희가 음대생인지, 복사집 알바생인지 정체성의 혼란이 올 무렵, 교재가 완성됐어요. 강사들은 각 문화센터에서 새로운 교재를 소개, 아니 팔았어요. 레퍼런스를 했던 강사도, 아무것도 안한 강사도 권당 수당은 300원이었어요.


열 권을 팔면 당시 김가네 참치김밥 한 줄을 먹을 수 있었어요. 교수님은 열 권 팔아서 뭐를 드셨을까요. 궁금하지만 굳이 계산은 안하기로 해요. 해봤자 빡치는 거 말고 뭐가 있겠어요.


20년이 지나니 검색과 캡쳐라는 훌륭한 기능이 일상으로 들어왔어요. 이거만 있었더라면 그시절 레퍼런스로 퍼래진 가계부를 구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 구하긴 뭘 구해요. 그냥 그 소집 자체를 거부해야죠.


너무 늦게 똑똑해진 영희는 그제서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오늘의 동화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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