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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14. 2020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전공은 이것!

인간에게 친절하니까.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행복해서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다. 가보니 더 좋았다. 이론으로도 너무나 완벽했다(라고 그땐 생각했다).


내가 전공을 좋아하건 말건, 부모님은 학비만 지원해준다 했다.  그 외에 내가 쓸 돈은 알아서 벌어 쓰라며.


당장 유치원에 데려다 놔도 너무 잘할 거 같은 의욕은 타올랐지만 찾아주는 곳은 없었다. 대신 교수님 추천으로 유아교육 관련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교수님은 왜 내게?




 교수님은 수업 내내 뭔가를 쓰게 했다. 외국 유아교육의 사례 비디오를 보고 쓰기, 조별 발표를 보고 쓰기, 과제 내 준 부분 읽고 쓰기, 남이 한 과제를 읽고 쓰기 등 팔 떨어지게 쓸 일이 많았다.


 다른 수업은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그러니까 고등학교 수업과 딱히 차이가 없었는데 유독 그 수업만 그랬다.    

  

그냥 쓰라고 해도 힘든데 모든 쓰기는 통일된 양식이 있었다. 좋은 점 혹은 배울 점, 아쉬운 점, 건의할 점.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눠 써야 했다.      

좋은 점은 쓸 말이 많았다. 1학년에게 유아교육 현실 고발 이런 영상을 보여주진 않을 터. 전공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 엄선된 영상이나 읽기 자료를 줬으니 쓰기의 시작은 늘 순조로웠다.      


난관은 아쉬운 점을 쓰는 거고 벽은 건의할 점을 찾는 거였다. 이미 훌륭한 자료들을 보고 고작 1학년이 뭘 찾는단 말인가. 전공생 고작 50명 수업인데 어찌 그 면전에 대고 ‘개선할 점’을 말한단 말인가.     


 몇 주 동안 헤매던 나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모르겠다. 생각나는 거 다 끼워 맞추자’라는 심정으로 기억나는 책, 드라마, 영화를 다 소환했다.


그 중 병아리 눈물만큼의 연관성만 있어도 다 갖다 붙였다. 동기들의 발표에는 칭찬과 개선점을 뭉뚱그려서 단점인 듯 아닌 듯 회색지대를 유지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수님이 말했다.


 은영이만 칸을 다 채웠네     


한 학기 후, 교수님은 내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추천했다. 유아교육 관련 출판사다. 유아교육 기관에서 하는 월별 행사 때 학부모에게 나갈 안내문 샘플 글을 쓰는 일이다.  


이걸 못하면 다음 달 핸드폰 요금을 낼 돈이 없다는 계산이 지나갔다.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그럼요. 쓸 수 있죠"

    

처음 원고는 빨간 줄이 90프로였다. 그래도 빠른 시간에 양을 채운 걸로 일단 인정받아 일을 시작했다. 이 일로 핸드폰 요금도 내고 술값도 넉넉히 썼는데 돈이 남았다. 올레!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집중하기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싫어한단다. 좀 더 편하게, 하던 방식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뇌가 원래 그리 생겨 먹은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집중해야 하고, 새로운 일을 자꾸 하면 뇌는 격렬하게 저항한다. 그래도 계속하면


 흠, 우리 주인이 진짜 하려나보군.
 그럼 내가 도와줘야지.

라며 태도를 바꾼다.


여기서 ‘양은 질은 채운다’라는 말이 나왔고 임계점이라는 말도 나왔다.      


물론 스무 살 시절에 저런 이야기를 알 턱이 없다. 그저 눈앞에 닥친 불을 끄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 지나고 보니 알겠다.


절대 안 될 거 같은 일도 급해서 하다 보면 얼추 흉내는 낸다는 것을, 첫 쓰기는 좋은 선생님을 찾기보다 일단 양을 채워보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이 두 가지는 앞으로 닥쳐 올 비정규직 생활을 버텨내는데 등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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