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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15. 2020

위대한 개떡

몸이 통과한 모험

개떡은 고소하고 향긋하지만 쑥개떡은 밍밍하다. 이 무슨 개떡 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진짜다. 개떡은 할머니가 직접 만들었고 쑥개떡은 떡집에서 샀으니까. 할머니가 만든 찐한 개떡을 먹고 싶은 가을이다     




먹는 음식보다 안 먹는, 혹은 못 먹는 음식이 더 많았다. 먹었다가 토하기도 일쑤였다. 한마디로 애물단지. 먹는 데 있어서 나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완벽한 애물단지였다. 새로운 음식은 무조건 거부부터 했다지.


대체 개떡을 처음엔 어떻게 먹었을까. 어쩜 이리 잘 먹을까. 이리 먹어도 어쩜 탈 한번 안 날까. 아무도 모른다.

   

  알든 말든 애물단지가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희귀템을 발견했으니 할머니와 엄마가 바빠졌다. 1년 치 쑥을 뜯으러 주말 오후에 나갔다.      


쑥 뜯으러 간다 하면 애물단지도 좋다고 팔랑팔랑 따라나섰다. 개떡 만들기 좋은 여린 쑥은 5월 초에 나는지라 그야말로 봄이 활짝 펼쳐진 때다. 힘찬 입김을 쏟아내는 사방의 생명력은 아이에게도 더없는 활력이다. 


그 생명력을 받아 괜히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뛰어보기도 하고, 풀반지를 만들다 눈치 없이 따라온 무당벌레에 기겁하기도 하고 개미집을 찾아 굳이 풀대를 밀어 넣어보기도 했다. 햇볕을 등에 엎고 이리저리 놀다가 나중엔 벌렁 누워 구름 구경으로 마무리.


그 무렵이면 김장봉투에 쑥이 한아름이다. 씻어서 삶은 쑥을 쌀가루와 섞어 둥글넓적하게 빚었다. 냉동실이 개떡으로 꽉 찼다.      




가을이 됐다. 애물단지네 학교에서 운동회 매스게임 연습을 시작했다. 연습이 끝나면 임원 엄마들은 봉봉 주스와 소보로 빵을 돌렸다. 애물단지는 집에 오자마자 툴툴댄다.      


“오늘도 간식 나왔는데

하나도 못 먹고 그냥 가져왔어”


“우리 강아지 속이 허하것네”


“안 허해. 그냥 짜증 나.

나는 왜 맨날 못 먹어?”


“입이 십리나 나온 게

그거 못 먹어서 그른거여?

그름 먹어. 먹고 화 풀어”


“먹었다가 또 속 이상하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선택이니 그냥 참어야지.”


“힝, 싫은데. 나 개떡이나 먹을래”     

출처 : https://masism.kr/4424

다음 연습 때는 그냥 먹어봤다. 봉봉 주스는 영 입에 안 맞아서 버렸다. 소보로 빵은 위에만 뜯어먹었다. 별일 없었다. 다음날엔 소보로 빵 하나를 다 먹었다가 소화 안 돼서 저녁을 굶었다. 드라마 <인현왕후>가 시작하는 시간쯤 되니 슬슬 배가 고프다.      


“할머니, 나 개떡 해 줘”

“이 밤중에?”

“어, 배고파”     


개떡을 먹으며 막판으로 치닫는 장희빈을 할머니랑 같이 봤다.




탈 날 수 있다는 거 알면서도 부딪혀봤고, 부딪힌 대가로 탈이 났음을 받아들이고, 한 끼 굶으면서 가라앉길 기다렸다. 일종의 모험이었다.


밀가루를 얼마나 먹으면 탈이 나는지 어른의 설명으로 가늠하지 않고 몸으로 통과해서 알아냈다. 이렇게 알아내니 남들 먹는 간식을 못 먹는 게 딱히 짜증 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 장면이 종종 생각난다. 아이가 탈 날 수 있다는 거 알면서 먹으라고 할 수 있을까. 드라마 볼 시간까지 안자는 것도 모자라 주방에서 뭘 만들어달라 요구하는 아이에게 고운 말이 나갈 수 있을까.


둘 다 못할 거 같다.  못 먹게 하는건 사랑으로 포장한 과잉보호일테고 고운말이 못나가는 건 인내력 부족이다.    

그러니까 왜
먹지 말라는 걸 먹어서
저녁도 못 먹고
         이 밤중에 엄마 쉬는 걸 방해해!      

어휴, 난 아무 말 안 했는데도 내 목소리가 들린다.

     



상상속에서 들린 내 목소리를 들으며  다시 할머니에게 묻는다.


"할머니, 나같은 애물단지한테 어쩜 그리 짜증도 안내고 키웠어. 비결이 뭐야. 지금 내 딸이 나랑 비슷하다는 건 알겠는데 나는 할머니처럼 안 돼."


그러면 할머니가 대답하겠지.

승질 나면 그냥 내.
승질 못내서 속앓이하는지
승질 내서 속앓이하는지
혀봐. 그름 알어.
너는 헌다면 혀.
그르니 일단 해봐.

응, 할머니.
일단 해볼게.
해봤는데도 안되면
내 투정 다시 들어줘.

옹냐. 내 강아지.


부딪혀보고 받아들이고 기다리고.


단순하지만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개떡이 가르친다. 할머니가 남겨줬다. 위대한 개떡.

출처 : 티스토리, 앙꼬의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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