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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17. 2020

엉덩이로 하는 사랑

깁스를 하고 알았다.

예쁜 얼굴부터 시작해서 쇄골, 팔, 가슴, 허리. 그러다가 대세는 애플힙이 됐다. 어느 신문에서는 엉덩이 근육이 전체 근육의 40프로를 차지한다면서 애플힙은 몸짱 상징이 아니라 건강수명 잣대라고도 했다. 어쨌든 또 엉덩이 강조다.      

출처 : 중앙일보


이들은 엉덩이로 하는 사랑이 있다는 걸 알까.      



1987년   


이비인후과에서 축농증 수술을 하라고 했다. 지금이야 내시경이지만 그때는 입 천정을 절개하고 어쩌고의 무시무시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옆에서 대강 들은 나는 공포에 질렸다. 집에 오는 내내 울었는데 집에 와서 할머니를 보니 더 서러워졌다.     

 

"으흐흑, 할머니이이...입 천정을 막...엉엉 "

"아이고 에미야. 얘 왜 이러냐"

"이비인후과에서 수술을 하라고 하는데요. 정말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수술은 제가 들어도 무섭긴 해요"


"애들은 크면서 좋아지기도 허는디 꼭 수술까지 해야것냐. 그냥 좀 지켜보면 안되것냐"

"어머니 생각도 그래요? 저도 그래요. 좀 기다려 봐요."     


수술은 무한정 연기됐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츄아아아왁 지지징 쿠오워어어왁 소리를 들으며 누런 코를 빼야 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소리였지만 입 천정 어쩌고가 또 나올까 봐 손가락이 얼얼하게 의자 손잡이를 움켜쥐고 끽소리 하나 없이 치료를 받았다.      

출처 : 야탑 이비인후과 홈페이지


수술 이야기가 나온 날부터 할머니는 바닥 손걸레질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다리를 적당히 펴 긴 타원을 만들었다. 옆에는 작은 쓰레기통을 놓고 다리 사이의 먼지를 걸레로 쓸어 모았다. 팔 닿는 옆의 먼지도 한쪽으로 모았다.  모인 먼지와 걸레에 붙은 이물질을 손으로 떼어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다음 엉덩이를 밀어 자리를 조금 옮긴 후 이 패턴을 반복했다.      


"할머니 뭐해? 왜 그렇게 청소해?"

"니 엄마처럼 엎드려서 쫙 밀기엔 나는 힘도 없고 다리도 아프잖냐. 대신 이렇게 하면 엉덩이가 다 받쳐줘서 괜찮아"

"왜 갑자기 바닥을 닦아?"

"너 코 수술하라고 했대매. 혹시 이런 먼지가 너한테 안 좋을까 봐"     


축농증과 먼지가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가 열심히 먼지를 없애서 나았는지, 커가면서 저절로 좋아진 건지, 수술 없이 축농증도 없어졌다. 엉덩이 손걸레질 기억도 없어졌다.      




2020년    

 

나는 인도를 달리던 전동 킥보드에 치여 다리 깁스를 했다. 걷는 게 힘들어졌다.      


 일주일쯤 지나 조금 살만해져서 애들 방으로 가봤다. 햄스터를 방에서 키우는 큰아이 방은 난리였다. 햄스터 케이지 톱밥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특유의 냄새도 났다. 아이에게 진공청소기와 밀대 걸레 닦기를 시켰다.     


냄새는 없어지지 않았다. 할머니처럼 걸레를 갖고 앉았다. 엉덩이로 밀고 다니며 다시 닦았다. 서서 보이지 않던 작은 먼지와 톱밥 가루가 그제야 보였다. 아이가 먼저 말했다.      


"엄마 뭐해? 왜 그렇게 청소해?"

"엉덩이가 받쳐주니 할 만 해. 이래야 진공청소기나 밀대가 못 본 부분까지 다 볼 수 있거든"

"아까 닦았는데 왜 또 닦아?"

"햄스터 냄새가 남아있어서. 혹시 너한테 안 좋을까 봐"      


아이와 나는 30년 전의 할머니와 나처럼 대화했다. 30년 전의 내가 그랬듯 아이도 그런가 보다 하고 휙 돌아섰다. 30년 전의 할머니가 그랬듯 나도 엉덩이로 밀며 오래 방을 닦았다.      


그렇게 닦으니 잠깐이나마 냄새가 좀 가라앉았다. 근본적인 해결을 하려면 햄스터 케이지를 세탁실이나 베란다로 옮겨야 한다. 알지만 아직은 못한다. 오래 기다리다 입양한 만큼 아이가 너무 좋아하고 방에서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관심이 조금 시들해질 때쯤 다른 데로 옮기려 한다. 그전까지 나는 할머니처럼 엉덩이 걸레질을 하겠지.    

  

남편이 햄스터집도 청소해줬다




엉덩이로 하는 사랑. 사랑을 받는 쪽은 사랑인지 잘 모른다. 사랑을 하는 쪽은 열심히 엉덩이를 밀며 긴 시간을 내어놓는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의 타이밍이 맞을 가능성이 희박함을 안다. 그래도 한다. 나를 지은 사랑이 이랬으니까.      


"할머니, 비염이면 모를까 축농증은 먼지랑 별 상관없대. 할머니 팔도 아팠을 텐데 그냥 적당히 살 걸 그랬어. 손걸레질 처음 해보는데 보통일이 아니네. 할머니도 힘들었지. 미안해. 난 애를 낳고 이만큼이나 키워야 고마움을 아는 헛똑똑이네"     


창틀을 잡고 한쪽 발에만 힘을 주어 기우뚱거리며 일어났다. 가을 한복판에 자리 잡은 해는 성큼 짧아졌다. 우뚝 솟은 아파트들이 차분한 어둠으로 잠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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