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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21. 2020

라이브 똥

문 열고 똥 누기가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날

첫 아이를 낳고 모든 게 서툴러 어려웠지만 가장 경악했던 지점은 ‘생리현상 비자발성’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가고 싶을 때 못 가고, 간다 한들 원하는 만큼 하지 못하는, 해우소의 고요함을 잃었다. 


문 연 채 뽀로로를 부르며 똥을 눴다. 애를 안고 누고, 안은 상태에서 뒷처리까지 하는, 내가 했는데도 어떻게 한지 이해 안되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완벽하게 끝났다. 올레~

이젠 다 지난 일이 되어 웃으며 말할 수 있고 그 순간 자체가 한 컷의 추억이 됐다. 구질구질함이 추억으로 되고 나서야 비로소 드는 생각, ‘할머니는 셋을 앉혀놓고 똥을 누었구나.’     




엄마는 퇴근해서 집에 오면 할머니에게 그날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시어머니에게 뭐 그리 할 말이 많았냐고 물어보면 엄마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같이 사는데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가 어딨어.
그냥 회사 사람 아닌
다른 사람한테 말하고 싶은데
너는 너무 어리잖아?     


문제는 그 재잘거림이 화장실까지 이어지는 것. 당시 화장실은 천정이 기울어진 자투리 공간이었다. 입구는 천정이 낮아 앉아서 손빨래를 하는 수도가 있었고 거기서 더 들어가야 변기가 있었다.


할머니는 안쪽 변기, 엄마는 입구 쪽 수돗가, 나랑 내 동생은 문가에 자리 잡았다. 나는 10살도 안됐을 때니 엄마와 할머니를 따라다니는 건 당연했다.      


할머니는 “아이고, 은영 애미야, 똥 싸고 말해도 되잖냐” 하면 엄마는 “저도 이거 빨아야 돼요. 엄니 기다리느니 그냥 같이 하죠 뭐 히히” 하며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는 관객 셋을 데리고 똥 누는 게 일상이 됐다.      


할머니가 아빠를 키울 때 화장실은 집 밖에 있는 재래식이었다. 설마 걷지도 못하는 애가 거기까지 따라오진 않았을 터, 할머니는 그 시절에 홀로 화장실을 누린 대신 쉰이 넘어 며느리와 손녀들 앞에서 라이브 똥을 눴다. 




내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 할머니에게 짝사랑 오빠에 대해 얘기했다. 좋아하는 오빠가 있는데 이 오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들 둘만 키우다가
느이 엄마를 만났잖냐.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어머니임~ 하고 부르는데
홀딱 반하겠더라.
뽀얗기는 또 으쩜 그리 뽀얀지.
넋을 놓고 봤다니까.
그런 이쁜 아가씨가 며느리가 되더니
나 똥 싸는 데까지 따라와서 조잘거려.
그래도 이뻤어.

머시매가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아직 뭘 볼 줄 몰라서 그랴.
너도 니 엄마만큼 이뻐.
머시매가 똑똑해지면 널 알아볼껴   

나는 엄마가 할머니한테 재잘거리듯 똥 누는 엄마 앞에 '이 머시매는 왜 똑똑해지지 않는가'를 성토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의 똥은 시원하게 내려갔고 나의 짝사랑은 시들하게 저물었다.




코로나로 애들이 종일 집에 있으면서 나의 해우소 시간이 종종 깨진다.  화장실에서 이제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거실에서 부르는 소리 “엄마!! 누나가!! 엄마!! 이것 좀 봐!!” 등등.     


불과 몇 년 전엔 노래 부르면서도 쑥쑥 잘 나왔는데 이젠 멀리서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나오던 게 쑥 들어간다. “엄마 화장실이야. 이따 얘기해!!”라고 바리케이트를 쳐야한다. 그러고 보면 구질구질한 그 시절이 멀티태스킹 강자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제는 오랜만에 놀이터에서 친구랑 놀고 온 둘째가 흥분한 상태로 “엄마아아”하며 뛰어 들어왔다. 나는 화장실에 있었다. “엄마 화장실이니까 이따가...”라고 말하려다가 문을 빼꼼 열고 다시 말했다.     


엄마 여기 있어. 잘 놀았어?
오늘 재밌었어?     


아이는 문 밖에 털썩 앉아서 놀이터에서 만난 새로운 친구들에 대해, 술래잡기가 얼마나 스릴 있었는지에 대해, 지탈(지옥탈출의 줄임말. 미끄럼틀과 정글짐 등 두 가지 이상의 놀이기구가 복합으로 있는 구조물에서 하는 놀이)을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일장 연설을 했다.


나는 다리에 쥐가 나서 일단 일어났다. 뭐, 부르는데도 없으니 신호오면 다시 가면 되겠지. 할머니의 멀티태스킹이, 엄마의 멀티태스킹이 궁금해지는 날이다. 그녀들은 종종 나의 이야기 중간에 끝을 봤으니 말이다. 나는 왜 처음부터 다시해야 하는가.


다시 할지언정, 사소한 일 하나도 엄마와 나누겠다는 아이의 마음이 그제야 들어온다. 아이가 나눠주는 일상이 몇 년 후엔 그리운 풍경이 될 지 모른다는 선배 엄마들의 말도 훅 들어온다. 쥐난 다리 쯤이야 이 풍경에 비할까.


살랑살랑 들어오는 바람 사이로 왠지 쿰쿰한 냄새가 그려지는 가을 저녁, 놀이터의 낭랑한 아이들 목소리에 밀려난 가을 하늘이 훌쩍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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