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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23. 2020

믿을만한 짓을  하지 않는 아이를 믿는 법

유전자를 생각하라

믿을만한 짓을 하지 않는 아이는 내 애가 아니라 나였다. 애는 그저 나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을 뿐.   

  



발단은 셜록 홈즈였다. 그는 방금 만난 사람의 인상착의만 보고 직업을 맞췄다. 손가락에 남은 희미한 반지 자국을 보고 결혼생활을 짐작했다. 마법같은 그의 추리력에 5학년이었던 나는 열광했다. 셜록은 루팡으로, 아가사 크리스티로 확대됐다. 나는 베이컨가 221번지(셜록 홈즈 배경이 되는 집 주소)의 시차로 살며 우리집 공식 부엉이가 됐다.      




8시쯤 잠자리에 든 할머니는 새벽 서 너 시쯤 일어났다. 난 할머니 옆에서 스탠드를 켜놓고 책읽는 중이다.


“너 오늘도 안잤냐"

“히히, 좀이따 잘게"

“그 탐정이 그리 재밌어?”     


할머니 일어날 때 쯤 잤다. 학교, 놀기, 피아노 학원, 숙제가 끝나면 5시. 그때부터 다시 잤다. 엄마가 퇴근하는 일곱 시쯤 할머니가 깨웠다.     


“우리 강아지 먹고 자야지.”

“어머니, 얘 어디 아파요?”

“아니, 밤에 뭔 탐정을 읽는다고 잠을 안 자. 늦게 자서 피곤한가 봐”     




고등학생이 됐다. 할머니가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할머니랑 방을 같이 썼다. 도서대여점에서 세트로 빌려온 만화책과 필사용 수첩이 방에 쌓였다.  

    

“이젠 만화야? 아침에 안 힘들어?”

“그래서 2교시까지는 거의 자”

“안 혼나?”

“혼나다가 말다가 뭐 그래”

“선생님도 포기한 거여?”

“그런가 봐. 이히히”     




10대와 20대를 지났다. 30대는 애 키운다고 버둥대다가 40대가 됐다. 애들 학교 간 사이 야심 차게 창고 정리를 했다. 필사 수첩 박스를 발견했다. 세상에. 내가 미쳤나 봐. 최대한 갈기갈기 찢어 재활용 수거함에 버렸다.  할머니도 이 수첩은 봤는데 어떻게 한마디도 안했을까.    



여성학자 박혜란 선생님은 저서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아이가 뭐를 하든 일단 믿어주는 게 중요하다 했다. <엄마의 20년> 오소희 작가님도 ‘내 아이가 잘못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먼저 믿고 기다리라 했다. 감동스러웠다. 나도 꼭 이래야지.      


애가 초등학생이 됐다. 숙제도 미룬 채 폰으로 그림만 그린다. 단전에서 화가 치민다. "야! 너는 지금!!"


엄마가 나선다. 

“하이고, 니 할머니 보면 기함하겠다. 어린애를 뭐 그리 찰지게 잡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내가 잡긴 뭘...”     


할머니 소리에 말이 기어들어간다. 엄마가 다시 말한다.    

 

“그냥 좀 둬. 너도 그렇게 살았잖아”

“아니, 나는 숙제는 했어. 그 정도는 해야 믿을 만하지 않아?”

“너도 믿을만하지 않았어”

“그럼 왜 냅뒀어?”

“딸이니까. 불법 아니니까. 니가 좋아하니까”


“쳇. 엄마는 출근해서 나를 못 보니까 화가 덜 나는 거야. 종일 붙어있음 화가 난다고”

“종일 붙어있는 니 할머니도 화 안 낸 거 같은데?”     


할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맨날 나한테 <우리 집 부엉이>라고만 했지 다른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림 그리는 아이 옆에서 노트북 그림판을 열고 동그라미, 하트를 이어 붙였다. 아이가 보더니 깔깔 웃는다.


“엄마도 그림 그릴 줄 알아?”                   

“어. 잘 그리진 못해. 그림판은 그나마 쉽네"

"부엉이는 왜?"

"엄마 어릴 때 할머니가 엄마를 부엉이라고 불렀거든"


유심히 보던 아이는 몇 분 후 내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밤에 안 자니까 낮에 졸리지? 이건 졸린 와중에 노트북 보는 부엉이야”    

아이의 첫 번째 메시지

“으하하하. 들켰네. 넌 뭐 이렇게 금방 만들어. 5분도 안 걸리네?”     

아이는 한껏 뿌듯한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금방 메시지가 온다.                

아이의 두 번째 메시지

 “졸려도 요리는 잘하니까”     

  세대차이란 이런 걸까. 난 저 흑백 부엉이 하나 그리는데 30분 걸렸는데 아이는 5분에 하나씩 척척 나온다.      

“으하하핫. 너 천재 아냐? 완전 빨리 그리는데?"

 

아이는 그 뒤로도 서 너 장을 더 그렸고 나는 한참을 웃었다. 내 얼기설기 그림이 여러 버전으로 바뀌는게 신기했고 그 중심의 아이가 달리 보였다.  너는 정말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었구나.


아이 세상을 조금 이해하자 할머니가 내게 주었던 평화가 시작됐다. 행위가 아닌 존재로 사랑하기. 할머니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인 동시에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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