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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Oct 11. 2020

1988년의 마리아

아기 잘도 잔다

육각형 블록이 깔린 마당. 구석 수돗가 바닥이 얼어 쌀뜨물을 부어놓은 듯하다. 양철 대문 위에 얇게 실린 눈이 한 번씩 쌀뜨물 위를 스친다. 겨울 햇빛이 단독주택 지붕의 살얼음에 닿아 번들거린다.      

“할머니, 빨리 가자. 늦으면 어떡해”     


매년 12월, 교회학교 성탄 발표회 준비를 한다.  해년마다 빠지지 않는 성극에서 여자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역할은 단연코 마리아다.


요셉과 마리아, 아기 예수(인형), 동방박사는 기본 세팅. 담당자들이 머리를 써서 강아지, 움직이는 나무, 꽃 등등의 캐릭터를 만들지만 아이들의 관심사는 ‘누가 마리아를 할 것인가’에 집중된다.    

 

1988년의 나도 마리아 노래를 연습하고 대본을 외웠다. 할머니와 나서는 평일 오후 연습, 올해 마리아는 인형을 안고 무대로 올라와 짧은 노래를 부르고 대사를 한다. 이쯤이야!      


“말구유에 누워서 쌔근쌔근, 고요하게 잠자는 아기 예수~♬”    

 

무사히 끝났다. 이제 동방박사에게 대사 할 차례. 그런데 숨이 턱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조금 전까지 마이크 없이 소강당 끝까지 들리게 노래를 불렀는데! 맨 뒷자리 할머니가 양 엄지손가락을 세워줬는데!


바닥에 아교 칠을 해놓은 듯 움직이지도 못했다. 눈 밑 근육만 파들파들 떨린다. 선생님이 뒤에서 대사를 읽어준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동방박사님”      


그 대사를 모르는 게 아니라고요. 입이 안 떨어진다고요. 말 대신 눈과 코를 막은 댐이 터졌다. 그대로 무대를 내려와서 맨 뒷자리까지 달려갔다. 고개도 못 들고 할머니에게 파고들었다.     

 

“우리 강아지, 많이 떨렸어? 노래는 진짜 잘했는디. 노래하느라 힘을 다 썼구나. 괜찮여. 눈물 그치면 가서 다시 해볼래?”     


여전히 고개를 파묻은 채 세차게 흔들었다. 다른 마리아 희망자의 솔로가 시작됐다. 할머니가 내 귀에 속삭인다.

     

“봐라. 쟈는 너보다 못혀. 이번 마리아는 대사보다 노래가 많아서 노래가 더 중해”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눈물은 들어갔어도 다시 일어나 해 볼 여력까진 없다. 세 번째 마리아가 올라왔을 때 강당을 나왔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옅어진 햇볕 사이로 한층 차가워진 바람이 할머니와 나 사이를 드나든다. 바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머니 팔에 꼭 매달렸다. 다 알면서 또 듣고 싶은 얘기가 생겼다.      


“할머니, 나 세 살 때 <아기 잘도 잔다>를 그렇게 잘했다고?”     


겨울마다 할머니가 하는 얘기지만 처음 듣는 듯 말을 꺼낸다.


세 살 때는 다른 교회를 다녔다. 그 교회의 성탄 발표 날, 세 살이었던 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는 초등학생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노래의 마지막 부분인 <아기 잘도 잔다>를  천연덕스럽게 불러 재꼈대나.      


세 돌도 안 된 아이의 <잘도 잔다>는 <자도 자아> 정도밖에 안됐겠다. 두 번 반복되는 이 부분은 음도 꽤 높다.


혀 짧은 소리로 그 높이를 다 따라한 덕에 무대 위의 초등학생보다 무대 아래의 세 살이 시선 집중을 받았다. 는 이야기인데 나는 세 살에 어느 교회를 다녔는지, 내가 뭘 하고 다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할머니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참을 웃었다. 관절염으로 얼굴 찡그린 날이 많은 할머니다. 그녀가 목젖이 보이게 깔깔 웃으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가 해주었던 많은 이야기 중 하필 이 이야기가 생각난 까닭은 뭘까. 목청껏 노래 불러놓고 한 마디 대사를 못한 아이의 변명이려니 싶다.


겨우 세 살 꼬마가 초등 언니 오빠들을 이겨먹은(어떤 세 살이 그랬어도 초등보다 눈길을 끌었겠지만) 기록은 울며 내려온 초등 언니보다 당당해 보이니까.       


할머니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일부러 틀린 음으로, 일부러 혀 짧은 소리로 나의 세 살을 흉내 냈다. 골목 입구에서 멈춘 채 둘 다 눈물나게 웃었다. 한참을 웃던 할머니가 묻는다.     


“우리 강아지 많이 떨렸어?”

“.......”

“괜찮어. 그럴 수도 있어”

“노래는 안 떨렸어”


“마리아 안 하면 어때. 마리아 못해도 노래는 니가 제일 잘해쓰야. 마이크도 없이 어쩜 그리 낭랑하게 강당을 채워. 요 콩알만 한 강아지가”


하면서 간지럼을 태운다.      


“으악, 할머니 그만그만! 간지러!”     




그 해, 인형 들고 하는 마리아 노래는 내가 불렀다. 요셉과 대화하는 마리아는 또 다른 아이가 했고 동방박사와 나오는 마리아는 또 다른 아이가 했다.


마리아를 원한 아이는 모두 마리아가 됐다. 작은 마리아들은 공연이 끝나고 한껏 상기된 얼굴로 무대에 다시 섰고 부모들은 손이 아프게 박수를 보냈다. 아기 예수를 위한 성탄인지, 어린 마리아를 위한 성탄인지 모르겠으나 그 순간 그 공간만큼은 평화와 행복이 가득했으니 성탄의 도리는 다 했거니 싶다.      


할머니가 그날 내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칭찬의 한 종류였겠지. 마리아를 해냈다 아니다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초등학생을 이겨먹는 세 살이든, 세 살처럼 울어버리는 초등학생이든, 할머니에게 난 그저 ‘우리 강아지’라는 사실을 확인한 기억이 전부다. 조건 없는 우리 강아지, 어린 시절을 갈무리하는 선명한 단어다.      


번들거리던 햇볕 대신 파리한 달빛을 담은 밤바람이 종탑의 성글게 쌓은 눈을 살살 밀어낸다. 밀린 싸라기눈이 작은 마리아들의 어깨에 내려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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