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가기 전까진 진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5살이 채 되지 않았는데 집 앞 슈퍼마켓에서 과자 이름을 읽더란다. 엄마가 놀라서 가게의 과자를 내 앞에 다 대령했다나.
남의 가게에서 호들갑 떤 게 무안해서 대령한 과자를 다 사 왔다나.
나의 할머니 양국순 여사에게 나는 세 번째 손녀다. 세 번째인데도 그녀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고작 쉰 하나. 그 나이에 관절이란 관절은 다 고장이 난 상태였다(고 한다).
고장의 이유는 생활고. 그녀의 남편은 두 아들만 남긴 채 둘째 세 살 무렵 세상을 떴다.
28년 후 둘째 아들이 꾸린 가정에 ‘애 봐 주마’ 하고 오기 전까지 양국순 여사는 생활고를 감당해야 했다. 1970년대 중후반, 특별한 기술 없이 시골에서 상경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상한 사무직은 못 되었을 터.
없이 시작한 첫째 아들네에 보탬이 되고자 함께 살면서도 청소 일을 했다.
당신 자신이 고된 생활이었기에 사무실로 출근하는 둘째 며느리가 말단이든 뭐든 예뻐 보였을까. 아님 관절염을 앓으면서도 했던 청소일이 지긋지긋 해서였을까.
이유가 뭐였든지 간에 내가 태어나고 한 달 후, 양국순 여사는 큰아들 집 생활을 정리하고 우리 집으로 왔다.
애초에 3년을 생각하고 온 거라 했다. 그런데 두 살 터울로 내 동생이 태어났고, 큰집으로 간다 한들 다시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고, 큰 며느리가 종일 집에 있는 큰집보다야 아침이면 아들 며느리 다 나가는 작은집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3년은 13년이 됐다.
양국순 여사는 어린 나를 데리고 산책할 생각은 못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내가 남들 다 좋아하는 여행도 안 좋아하고 오로지 집만 좋아하는 집순이가 된 데에는 양국순 여사의 공이 반이라 했다.
나도 아이를 낳아보니 조금은 수긍이 된다. 말도 트이기 전의 아이가 신발로 현관 바닥을 탁탁 치며 ‘나갑시다’를 온몸으로 외치는 모습을 두 아이 모두에게서 봤고, 그 부름에 응했더니 하루 7시간을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됐으니 말이다.
내 아이를 보면서 만난 대부분의 아이들은 현관 바닥을 때리던데 나 어릴 땐 안 때렸는지, 때려봐야 가망 없으니 일찌감치 포기했는지 그때부터 이미 집순이였단다. 아침에 끝난 텔레비전 방송이 오후 다섯 시쯤 돼야 다시 시작하는 시절이다.
“할머니, 티브이도 없는 시절에 대체 나랑 종일 뭐했어?”
“뭐하긴. 공부했지”
“으잉? 공부? 말도 못 하는 애를 데리고?”
양국순 여사의 결혼생활은 고달팠으나 그녀의 어린 시절은 ‘가죽 가방 들고 학교 가는 양씨네 딸’이었다.
1920년대에 태어난 여자가 학교를 간다는 것도 대단하고, 보자기에 얼기설기 싼 책이 아닌 ‘가죽 가방’에 책을 넣었다는 것 또한 대단한 일임은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어쩌면 그 시절의 대단함을 셋째 손녀를 보면서 비로소 다시 마주한 게 아닐까.
그녀가 선택한 대단함은 그저 성경을 읽는 것. 생활고에서 벗어나 한문 가득한 성경을 막힘없이 읽는다는 것은 우아함으로의 부활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부활은 어린 손녀의 글눈을 틔웠다. 애가 보든 말든 옆에서 연신 소리 내어 글을 읽으면 아이는 어느새 한글을 더듬더듬 읽는다. 천재라서가 아니고 배우기 쉬운 한글이라서, 시간이 쌓여서 저절로 되는 일이다.
거기에 천재인 줄 알고 황급히 ‘아이템플’을 주문한 엄마의 기동력도 한몫했으리라. 지금으로 치면 학습지 비슷한데 선생님은 안 오고 매일 시험지가 한 장씩 왔다. 대충 줄 긋기부터 따라 쓰기, 읽기 순으로 진행됐다. 아이템플을 학교 가기 전까지 했으니 꽤 충성고객이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와 내가 13년 동안 거쳐 간 집이 일곱 채다. 나는 세 번째 집부터 기억한다. 천정이 유난히 높아 연탄을 아무리 열심히 떼도 끝끝내 싸늘했던 거실, 그래서 10월부터 4월까진 ‘방 문 닫아!’가 가장 많이 들리던 집이다.
방문 닫고 뒹굴 거리다가 엄마의 밥상 준비에 코를 벌름거리며 “오늘은 김치찌개, 계란말이”라고 맞추면 “야는 아무 냄새 안 나도 맞추는 게 신기혀”라고 말하며 같이 코를 벌름거리는 할머니가 있던 집이다.
아이템플 하고 있으라고, 할머니 연탄 갈고 오겠다고 하면 그 새를 못 참고 기어이 따라붙어 결국에는 7살 큰 손녀, 5살 작은 손녀를 대동하고 보일러실에 가야 했던 집이다.
혼자면 5분으로 될 일이 따라붙은 손녀들 잔소리로 30분까지 늘어나도 싫은 소리 한번 없던 할머니가 있던 집이다.
시끌벅적 연탄 갈기가 끝나면 할머니는 내게 찡긋 눈 신호를 보내고 동생의 정신을 딴 데 팔게 했다.
나는 그새 부지런히 아이템플을 완성했지. 할머니는 번호마다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줬다. 그 동그라미가 자랑스러워서 텔레비전 뒤의 큰 창문에 한 장 씩 붙였다.
창밖의 나뭇잎 그림자가 몇 개나 동그라미 속에 들어오는지 세는 게 그날의 중요한 일과였던, 그런 집이다.
나의 아이들은 아이템플 대신 컴퓨터로 온라인 숙제를 한다. 연탄 갈러 나갈 일도, 시험지에 나뭇잎 그림자가 어른거릴 일도 없는 고층 아파트다. 그런데도 서늘한 바람이 훅 들어오는 날이면 ‘방문 닫아’라고 외치던 집이 훅 그려진다.
그 시절 바람은 반드시 계절과 이어졌다. 아파트의 가을바람은 에어컨이 필수인 여름을 보낸 가을바람이다. 반면 그때 집이 품은 바람은 계절의 정수가 살아있는 바람이다. 에어컨이 귀한 때였으니까.
계절을 담뿍 담은 바람 사이 연탄실의 매캐한 냄새마저 그림 같다. 클릭 하나로 세상 온갖 것이 다음날 현관 앞에 놓여있는 시대가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그림이다. 이 그림 중심에 있던 할머니는 지금보다 뭐든 부족하던 그 시절을 가장 풍요로운 시절로, 가장 부유한 집으로 만든다.
아파트 옥상 끝에 걸린 놀이 잦아들며 어둠이 깔린다. 동그라미 속 그림자를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