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린이집은 좋은데 낮잠은 싫어”
“응? 친구들 낮잠 이불 못 봤어?”
“봤어. 낮잠 싫어”
고작 4살이 뭐 이리 단호한지.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6월 햇빛은 뭐 이리 화사한지. 그 햇볕을 역광으로 받은 아이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뭐 이리 선명한지. 단호, 화사, 선명에 눌린 어미는 할 말을 잃는다.
“그래. 점심 먹고 오자. 시간 맞춰 데리러 갈게”
10시 등원, 1시 하원이 시작됐다. 큰 애 보내고 둘째와 다디단 아침잠을 잤다. 방해 없이 아침에 잘 수 있음이 그저 감사했다. 감사하지 못한 건 수유티와 아기띠의 조합. 이 조합은 어떻게 해도 난민 같았다. 미친 듯이 빠지던 머리는 그간의 설움을 보상하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잔머리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묶는다 해도 헤어라인 따라 삐죽삐죽 솟은 잔머리는 숨길 재간이 없다. 모자를 머리에 이식이라도 한 냥, 매일 썼다. 되도록 안 나가고 싶었지만 큰 애 등 하원 때문에 매일 나가야 했다.
이런 모자를 찾아볼걸 그랬나
어린이 집에서 우리 집까지 어른 걸음으로 5분도 안 걸린다. 하지만 어른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것들_개미부터 시작한 각종 벌레, 나뭇가지, 돌멩이, 반짝이는 쓰레기 등등_은 7세 미만 아이들만 들리는 텔레파시를 쏜다.
‘어이, 나 여깄어. 우리 만나기로 했지?’
아이는 늘 이 부름에 충실히 응답했고 난민 어미는 한숨 쉬고 그 뒤를 따랐다. 처음엔 애가 뭘 줍는지 불을 켜고 보다가 그것도 지쳐서 입을 닫았다. 8킬로를 돌파한 둘째를 아기 띠에 매고 1시간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만 남는다. ‘내 힘을 내가 빼면 안 된다’
벤치라도 보이면 얼른 앉았고 없으면 돌 담 사이라도 앉았다. 큰 애가 뭔가를 주워서 뭐라고 떠드는 소리는 아랍어처럼 뇌에 닿지 못하고 통과했다. 뭐를 가져오든 그저 ‘옹야 그랬쪄. 멋지다. 이쁘다’만 해도 아이는 생긋 웃어줬다. 그 미소에 10초간 미안했고 이내 ‘어떻게 꼬셔서 집에 가지..’만 머리에 가득 남았다.
갑자기 낙엽이 데굴데굴 구른다. 아이는 돌고래 음파같은 소릴 지르며 낙엽을 쫓아간다. 그대로 30초만 더 가면 우리 집 입구다. 나는 낙엽에게 감사의 절이라도 할 판이다.
이제 10초만 더 가면 되는데 그새 바람이 변덕이다. 갑자기 집 반대방향으로 구른다. 아이는 방향 바꾼 낙엽이 더 재미있는지 아까보다 더 깔깔대며 쫓아가기 시작한다.
낙엽이 한 바퀴 구를 때마다 집은 5분씩 멀어진다. 쫓아가서 저 낙엽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데 벌써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졌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
“썅, 저놈의 낙엽을!”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놀랐다. 이거슨 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녀. 그새 낙엽에 반한 아이는 더 멀어졌고 화들짝 놀란 나는 걷는지 뛰는지 모르게 뒤뚱거리며 아이를 부른다. “같이 가! 혼자 가면 안 돼!”
아기 띠에서 선잠이 들었던 둘째가 엄마의 격렬한? 움직임에 깼나 보다. 제 정수리 위에서 씩씩거리며 소리 지르는 내 볼에 손을 올린다. 나는 그제야 둘째를 내려다봤다. “아, 맞다. 너도 있지. 우리 아가 엄마 때문에 놀랐어?”
아이는 소리도 없이 입모양으로 헤~ 웃는다. 투명한 침이 주르륵 흘러 내 옷깃에 흔적을 남긴다. 비릿한 젖 내음이 묘한 안정감을 준다. 그때부턴 뛰지 않고 조금 빨리 걸었다. 어차피 뛰는 속도와 별반 차이도 없다.
저만치 앞서갔던 아이가 갑자기 멈춰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보고 “옴마아~”하면서 다시 달려온다.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손 번쩍 들어 흔들었다. 아기띠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로 안아야 했지만 감격스러운 상봉이다.
아이의 볼은 붉게 달아올라 윤기를 담았다. 출하 직전 왁스 바른 홍옥이 이보다 더 빛나랴. 물려받은 베이지색 누비 경량 패딩은 두터워진 가을바람과 햇볕을 다 담아 폭삭한 향을 뿜는다. 홍옥보다, 향기보다 더 또롱 또롱 해진 아이 눈동자는 세상의 뿌듯함을 다 가지고 있다. “옴마, 나뭇잎이 저기까지 갔는데”
뒤따라오는 엄마가 없었다면 아이가 이토록 신나게 뛸 수 있었을까. 그리 뛰어도 뒤에서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틀림없이 있다는 확신이 아이의 등을 떠밀어 더 뛰게 하지 않았을까.
부모가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교과서 같은 말이 조금은 이해되는 날이었다.
네가 어디까지 가든 지켜봐 줄게. 내가 앞서서 ‘이쪽으로는 뛰지 마’ 하면서 네 울타리를 좁히는 짓은 하지 않을게.
너의 세상과 나의 세상은 또 다를 테니. 달라진 세상이어도 베이스캠프는 필요할 테니. 나는 베이스캠프로서 충실히 자리를 지킬게. 그러니 낙엽과, 벌레들과 막대기의 텔레파시가 들리는 이 순간을 더 많이 쌓자.
낙엽이 하나 또 굴러온다. 오늘은 대체 집에 언제 갈까. 순간을 쌓고 싶기도, 집에 빨리 가고 싶기도 하다. 두 마음이 싸우는 독박 육아의 하루가 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