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나으려니 했던 얕은 기침이 떨어지지 않는다.
큰 아이를 등원시키고 둘째만 데리고 동네 내과에 갔다.
안녕하세요, 예, 오랜만이죠. 심하진 않은데 기침을 계속하네요. 아뇨 둘째요.. 맞아요. 그때 아기 띠에 있던 애. 그러게요. 벌써 이렇게 컸어요. 현수야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아이는 의사를 보고 웃으며 아~ 만 하고 나를 본다. 나는 “응, 누나도 아는 선생님이셔. 현수가 많이 커서 누나인줄 알았대” 라고 말해줬다. 나와 현수의 대화를 본 의사가 묻는다.
“몇 개월이죠?” / “34개월이요”
“영유아 검진에서 발화 단어 적다고 나오지 않아요?”
“아... 그게.... 제가 시기를 놓쳐서....큰 애도 있고...좀 바빴고.. (독박육이기도 하고)그래서...”
마땅한 단어를 찾는 중에 의사가 다시 치고 들어온다.
“엄마 물 줘, 밥 먹을래. 쉬하고 싶어.. 이런 말, 엄마 아닌 다른 사람도 알아들을 만큼 명료하게 해요?”
“명료한 단어는 엄마밖에 없어요. 아빠, 까까, 싫어, 물 등등 아무것도 안하고 아/어/이 3개로 모든 감정을 표현해요.” 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저 “아니요...”
“은영씨, 몇 년 전에 내 말 듣고 바로 대학병원 가서 수술해서 일 커지지 않고 잘 끝났잖아.
이번에도 애 데리고 대학병원으로 가요. 아동 센터 이런데 가지 말고. 꼭 대학병원. 소아발달과에서 검사해야돼. 알았지?”
몇 년 전, 배가 사르르 아파서 이 병원에 왔다. 내 증상을 들은 의사는 바로 복부 초음파를 했다.
심각한 얼굴로 자리에 앉더니 다짜고짜 묻는다.
“은영씨, 시부모님이나 친정 가까워요?” / “아뇨”
“남편 연차 쓰기 괜찮아요?” / “왜요?”
“놀라지 말고 들어요. 지금 콜택시 불러서 바로 경희대병원 가요. 가깝잖아. 내가 소견서 써줄 게요. 외래 닫으면 대기만 길어져요. 그러니까 집에 들르지도 말고 바로 가. 마지막 식사가 언제예요? 금식해야 돼서... 빠르면 오늘 밤에 수술 잡을 수도 있을거예요"
얼떨결에 경희대병원에 갔고 검사 몇 가지를 하더니 정말 그 다음날 새벽에 응급수술을 했다. 수술을 집도한 교수님은 동네 병원 잘 뚫었다고 칭찬했다.
그랬던 의사였다. 그 의사가 또 대학병원에 가라고 한다. 이번엔 애를 데리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기침약을 안 받은 게 생각났다. 처방전은 어디있지? 처방전을 두고 왔나? 받긴 받았나? 하고 있는데 소아과 간판이 보인다.
‘현수를 많이 본 소아과 선생님이 더 잘 알거야.’ 두 돌 이후로는 무조건 걸으라 했던 아이를 덥석 안아 올려 뛰었다.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간만의 호사를 누리며 까르르거린다. 젤리를 물고 웃는 아이의 달큰한 입냄새와 초겨울의 쨍한 햇빛이 덩어리가 되어 나를 누른다.
“엄마아~ 엄마아~”
“응, 알아. 신나지? 오늘만 안아줄게”
“안녕하세요. 선생님. 아뇨. 아파서 온 건 아니고 뭐 좀 여쭤보려고요. 현수 오래 보셨잖아요. 내과에서는 대학병원 발달검사를 하래서요.”
“영유아 검진에서 뭐 나왔어요?” 의사들의 질문은 똑같구나.
“실은 6개월 이후로 검사를 못해서. 특별히 아프지 않으니까...”
“아이고... 큰애는 안 그랬으면서...그럼 엄마 말고 다른 사람도 확실하게 알아듣는 단어는 몇 개나 되요?”
아, 진짜 왜 다들 똑같이 묻냐고! 나도 모르게 손톱 옆 거스러기를 잡아 뜯었다.
“명료한 단어는 엄마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엄마에 온갖 감정을 다 담아서 다른 톤으로 부르긴 하..거든...요...그래서 저는 알아듣는데...” 어깨가 자꾸 안으로 말린다.
“음... 현수엄마, 제가 말하는 단어는 그냥 단어예요. 감정이 담긴다고 한 가지 단어를 몇 개로 나누지 않아요. 언어발달은 시기차이가 있긴 한데 기다려 보자고 하기엔 발화수가 너무 적잖아요? 아산으로 가요. 소견서 써드릴게요”
며칠 후, 아산병원 놀이치료실로 안내받았다. 나와 현수의 놀이를 언어치료 연구원이라는 사람이 보면서 뭔가를 썼다. 놀이 후 10장 남짓의 설문지를 풀어내고 나서야 의사 앞에 앉았다.
“영유아 검진 결과가 없네요?”
이쯤 되면 의사들의 질문 매뉴얼이라고 봐도 되는 거지. 나도 매뉴얼로 대답한다.
“네, 죄송합니다.”
“발화언어가 10개월, 수용언어가 40개월 나왔어요. 이정도로 차이나기 쉽지 않은데.... 놀이실 결과지 보니까 애는 말을 안 하고 엄마가 아이의 말을 다 해준다고 하네요? 얘 또래에서는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아니, 말을 안 하는 게 아니고 단순한 모음으로 다양한 감정을 표현한다니까요? 이게 아무나 되는 줄 아세요? 둘만의 언어로 끈끈해지는 이 안정감을 선생님이 아세요? 독박육아로 24시간 끼고 있으면 애 눈빛만 봐도 다 알거든요? 라고 말하진 못했다. “아, 놀이실에서요? 네....”
“병원 치료실이 제일 좋은데 대기가 밀려서 8개월 기다려야 해요. 일단 대기 걸고 사설 센터 먼저 가세요. 얘는 진짜 하루라도 빨리 치료 시작해야 됩니다. 진단서 코드에요. 만7세에 재검해서 장애 확정 코드 받으세요. 지금은 이걸로 치료지원금 나올 거예요.”
잠깐만요, 장애 확정 코드요? 라고 묻지 못했다.
주차 위치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주차장에서 알았다. 여긴지, 한 층 더 내려가야 되는지, 모르겠다. 주차장에서 30분을 헤맸다. 눈물 같고 땀 같기도 한 짭짤한 뭔가가 마른 입술에 닿았다.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허기가 몰려왔다. 냉면 그릇에 밥을 담아 애매하게 남은 반찬들을 다 쏟아 붓고 비볐다. 계속 먹는데 계속 배고파서 더 빨리 먹었다. 목이 막혔다. 탄산수를 꺼내 밥이 가득 찬 입에 들이부었다. 그대로 사래가 걸려 기침이 나왔다. 먹던 밥을 다 토한 후에야 기침이 멈췄다. 이틀을 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