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를 추모하며

by 촛불 맨드라미

2003년 여름, 고흐를 좋아하는 나는 그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갔다. 시부모님과 함께 한 나의 첫 유럽 나들이였다. 고흐가 약 두 달 반 동안 머물렀던 라부 여인숙과 동네, 그의 고단한 삶의 무게와 그림에 대한 열정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그의 동상이 서 있는 공원, 그가 그렸던 오베르 교회와 밀밭, 오베르 쉬르 우아즈 성, 그의 영원한 안식처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또 그렇게 불우하게 살다간 고흐와 그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도왔던 동생이자 후원자였던 테오!

밀밭 가까이에 있는 묘지에 나란히 누워 있는 그들,

포근한 이불처럼 그들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덩굴.

살아생전 나누었던 형제애로도 부족해 죽어서도 나란히 묻혀 있는 그들을 보면서 밀려오는 감동이란....


100여 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그의 무덤 앞에 서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고독과 절망 속에서 힘겨운 삶을 스스로 포기했던 고흐.

6개월 후 그를 뒤따라간 테오.

그의 그림이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는데

서로 조금만 더 버텨주었더라면....

그들의 죽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현재 그의 명성과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무덤에 속상하기도 했다.


올해 4월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을 찾았다. 그는 아를의 환한 빛과 따뜻한 공기를 느끼면서 희망과 생명과 태양의 색 노랑을 발견했고, 화가로서의 영혼이 자신 안에서 깨어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고갱이 온다는 기대감으로 그린 ‘해바라기’, 그와 함께 살던 ‘노란 집’, 밤의 포름 광장과 카페의 아름다움을 그린 ‘밤의 카페테라스‘, 고요하고 평온한 푸른 밤하늘을 그린 ’론 강 위에 빛나는 별들‘, 생 레미의 생 폴 드 무솔 요양원에서 그린 강렬한 붓 터치와 어지러운 소용돌이의 ’별이 빛나는 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린 ’꽃 피는 아몬드 나무‘ 등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아를과 생 레미에서 그려졌다고 한다.


그의 그림에는 사람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힘과 강렬한 감정,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경책이 있는 정물’을 통해 목회자인 아버지에 대한 그의 감정을, ‘감자 먹는 사람들’을 통해 농민들의 진솔한 삶과 그들에 대한 그의 따뜻한 시선을, ’씨 뿌리는 사람‘을 통해 희망과 생명력을, ’귀를 자른 자화상‘을 통해 좌절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어두운 하늘과 까마귀 떼, 끊어진 길이 그의 절망감과 함께 죽음에 대한 암시를 주는 듯했다.


그의 발자국을 따라 로마시대 공동묘지인 알리스캉의 가로수 길과 아를 공원, 아를 원형경기장, 포름 광장의 카페, 론 강, 자신의 귓불을 자른 후 입원했었던 생 폴 요양원을 찾아갔다. 그가 살던 집은 2차 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없어졌고, 그가 그림을 그렸던 그 장소들엔 그의 작품 복제품이 전시되어 그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아를의 여인들이 아름다움을 뽐내며 걸었다는 알리스캉 가로수 길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아를 공원에는 아기를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과 청소년, 노인 등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북적댔다. 원형 경기장엔 체험학습 온 한 무리의 학생들 앞에서 옛날 로마시대 검투사 복장을 한 두 사람이 칼과 방패를 들고 결투하는 모습을 시연했다. 최선을 다하는 검투사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학생들의 모습이 정겹고 사랑스러웠다.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한 체험학습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의 추억을 소환해 주었던 원형 경기장을 떠나 그가 자주 갔었다는 포름 광장을 찾았다. 카페에는 ‘반 고흐’라는 글자만이 그의 자취를 느끼게 할 뿐, 그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밤에 다시 가보았으나 여전히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나라였다면 그림 모습과 똑같이 복원해 놓았을 텐데....


론 강을 찾아갔지만 별도 뜨지 않은 어둑어둑한 밤, 주변의 가로등만이 강물을 비추었다. 생 폴 요양원은 그와 관련된 종합문화센터인 ‘에스파스 반 고흐’로 바뀌었고, 건물과 정원은 그의 그림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아를에서 내보내라는 주민들의 탄원으로 그는 퇴원 후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그를 따라 다시 오베르로 갔다. 마을은 그전과 달리 많이 변했다. 집들이 훨씬 많아졌고 거리 곳곳에 그의 발자취를 알려주는 표지판이 걸렸다. 그를 치료해 주던 가셰 박사가 살던 집을 찾았으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오베르 교회 앞에 전시되어 있던 ‘오베르 교회’는 교회 안에 걸렸고 그 대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커다란 복제품이 사람들을 맞았다.


오베르 교회 위쪽 밀밭을 지나 그와 테오의 무덤을 찾았다. 묘지가 많이 늘어난 탓에 그들의 무덤을 찾는 데는 예전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형제는 여전히 담쟁이덩굴 이불을 나란히 덮고 있었다.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면서 먹먹한 가슴을 안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 성으로 향했다.


이전에 왔을 때는 성 안의 미술관이 공사 중이라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건물 뒤 언덕에 앉아 잘 다듬어진 정원과 예쁜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오베르 마을을 내려다보기만 했을 뿐. 이번에는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된 작품이 많지는 않았으나 미디어 아트 전시실에서 그의 수많은 작품들을 만났다. 미술관을 나와 21년 전 시부모님과 함께 앉아 있었던 언덕에 올라 돌아가신 아버님을 추억했다. 평생 그림을 그리면서도 정작 유명한 화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건 처음이라 무척 좋아하셨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아를과 오베르 곳곳에서 그의 숨결을 느끼며

그의 열정에 감동했고 그의 외로움과 절망감에 가슴이 아팠다.

자신의 삶과 영혼을 다 바쳐 불꽃처럼 살다간 천재 화가 고흐!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명언을 온몸으로 보여준 화가!

‘화가는 죽어서도 그림을 통해 후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던 여행이었다.


*주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탈 인상파) 화가로, 인상주의, 야수파,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미침

-탈 인상파: 인상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 확립

-인상주의 :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인 효과를 이용해 자연을

묘사, 모네의 ‘인상, 해돋이’ 참조

-야수파 : 강렬한 색채로 감정을 표현, 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 참조

-표현주의 : 작가의 주관적인 감정이나 개인적인 경험을 담아냄, 뭉크의 ‘절규’ 참조

-10년 동안 900여 점의 작품과 1,100여 점의 습작을 남김

-아를에서 약 1년 거주하면서 200여 점을 그림

-오베르에서 약 두 달 반 동안 70여 점을 그림

-네덜란드에 있던 테오의 무덤을 테오의 부인인 요한나가 고흐 옆으로 이장함

-요한나가 고흐의 작품들과 형제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었고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서게 됨

-1963년 반 고흐 재단 설립, 1973년 암스텔담에 반 고흐 미술관 개관, 요한나가 보관했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음

-참고 문헌: 위키 백과사전, 양정무 교수, 전원경 교수 강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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