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고대 문명이 살아 숨 쉬는 도시, 신화의 도시 아테네를 다녀왔다.
‘펑 펑’
저녁 내내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 바로 앞에서 터지는 듯한 소리. 시위자들은 호텔 가까이에 있는 신타그마 광장에 운집해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거리로 이동하는지 구호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러다 그들의 웅성거림과 구호가 차츰 멀어져 갔다.
간격을 두고 터지던 소리가 연발총 쏘듯 펑펑 잇달아 터졌다. 이한열 열사의 쓰러지던 모습이 떠오르면서 누군가가 다쳤을 것 같아 무척 걱정되었다. 자정이 되어 가는데도 그 소리는 그치지 않고 여전히 멀리서 들려왔다. 역사상 최초로 직접민주주의 정치를 했던 아테네에서 시민들이 데모를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신타그마 광장과 국회의사당 앞의 무명용사 기념비를 둘러보면서 재채기와 함께 눈물, 콧물을 흘려야 했다. 어젯밤의 데모 흔적은 말끔히 치워졌지만 최루 가스 분말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국회의사당은 원래 왕궁이었으나 1934년부터 국회로 사용되고 있고, 신타그마 광장은 국회의사당 바로 앞에 있다. 신타그마는 헌법을 의미하며, 1843년 그리스 국민들이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 공포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곳은 교통과 상업, 정치, 역사의 중심지여서 무척이나 혼잡했다.
무명용사 기념비는 전쟁에서 희생된 신원 미상의 그리스 군인들을 추모하는 비다, 벽면에는 그들이 사망한 전투 장소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벽면에 우리나라도 적혀 있어서 가슴 뭉클했다. 6.25 전쟁에 참전해 우리를 도와주었던 그들의 넋을 기리며 묵념했다. 매일 정각 그 비 앞에서 근위병 교대식을 진행한다. 전통적인 복장을 하고 천천히 발을 높이 드는 특이한 걸음으로 절도 있게 교대하는 의식이 이루어진다는데 우리는 보지 못했다. 최루가스 탓인지 구경꾼도 없었다. 일요일에는 웅장한 음악과 함께 멋진 행진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조금 걸어가니 쾌적한 녹색 공간인 국립 정원이 나왔다. 다양한 식물과 동물, 조각상, 고대 유적이 있어서 오랜 역사를 느낄 수 있었다. 국립 정원을 나와 오렌지 나무 가로수 길을 걷다가 근위병 훈련소와 마주쳤다. 문 앞에는 그리스 전통 복장의 멋진 유니폼을 입은 근위병이 서 있었다. 같이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물었지만 대답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인 작은 도시라 걸으면서 곳곳의 문화 유적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인 제우스 신전은 기원전 6세기 아테네의 통치자가 짓기 시작해 131년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 때 완공되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의 코린트식 기둥 104개가 있었는데 지금은 15개만 남아 복원작업 중이다, 넓은 신전 터와 높고 두꺼운 기둥, 부속 건물인 목욕탕 유적의 잔해로 미루어 보아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신들의 왕다운 대우라고나 할까?
아테네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신전의 남문 옆에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을 세워주었다. 이 개선문은 고대 아테네 구시가지와 하드리아누스가 건설한 신도시의 경계가 된다. 개선문에서 길을 건너면 우리나라의 인사동쯤 되는 플라카 거리가 나온다. 현대와 고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구시가지로 활력이 넘친다. 좁은 골목과 작은 광장 주변에 차지키 소스용 딜이나 갖가지 허브 차, 비누, 포도주, 올리브유, 열쇠고리 등의 기념품을 파는 가게와 보석, 의류, 아크로폴리스 유적이 그려진 도자기 공예품을 파는 가게, 노천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참 구경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레스토랑을 찾았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노천 레스토랑에서 오래 기다린 끝에 착석할 수 있었다. 수블라키와 무사카를 주문했는데 시키지도 않은 빵이 먼저 나왔다. 무료로 주는 빵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양도 많거니와 상술인 것 같아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음식을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있던 중국인 청년 두 명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식비를 지불하고 몇 발짝 가더니 다시 와서는 바구니에 담긴 빵을 다 집어 가버렸다. 계산서를 보고서야 자신들이 빵 값을 지불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 부부는 마주 보며 웃었다. 어제 우리가 당했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제 하드리아누스 도서관 앞 골목길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음식과 음료수를 주문했다. 음료수와 함께 물 한 병도 나왔다. 그리스는 다른 나라와 달리 무료로 물을 주는구나 생각하며 내심 기뻤다. 식사 후 남은 물을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무나 친절하게도 가져가란다. 흐뭇해하며 가져간 물통에 물을 채우고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헉! 거기에 물값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뭔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 주문하지 않은 물이 나와서 무료인 줄 알고 좋아했는데.... 그렇게 생각한 우리가 너무나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아크로폴리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주:
-딜 : 그리스 전통 요구르트 소스인 차지키 소스에 들어가는 식용 허브
-수블라키: 돼지고기나 양고기, 닭고기를 소금과 후추, 레몬즙, 오레가노를 섞은 양념에 절인 후 꼬치에
꿰어 올리브유를 발라가며 숯불에 구운 요리
-오레가노: 지중해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로 잎을 말려 허브로 사용함, 주로 그리스에서 고기 요리에 사용
-무사카 : 가지와 감자, 고추, 다진 돼지고기나 쇠고기로 층을 쌓은 뒤 위에 치즈와 밀가루, 계란을 이용힌
소스를 끼얹어 오븐에 구운 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