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애장품, 나의 장난감

도둑맞은 마란츠

by 이성수
스크린샷 2023-08-16 오후 2.26.12.png 정확한 모델명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의 마란츠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사진을 찾았다. 이 모델 같기도 아난 것 같기도...

아버지는 휴일이나 기분 좋은 저녁이면 언제나 음악을 들으셨던 기억이 난다. 엘비스 프레슬리, 블론디, 특히 기분이 좋으신 날에는 어김없이 바카라의 'Yes sir, I can boogie'가 흘러나왔다.


한 번을 입어도 10년 입은 것 같은 옷이 되는 나와는 다르게 아버지는 뭐든 최상의 상태로 관리를 하셨다. 특히 오디오 시스템은 아버지의 최애장품으로 나는 전원도 켜지 못하게 하셨다. 평소 먼지 한 톨 내려앉은 걸 본 기억이 없다. 아마 그때 내게 전원을 켜는 것을 허락하셨다면 아버지의 오디오는 단숨에 고물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르지..


사실 어린 내게 아버지의 애장품인 마란츠 리시버는 그저 신기하고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마란츠 리시버에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커다란 다이얼이 있는데, 그 다이얼을 휭휭 돌리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엄지 손가락으로 좌에서 우로 또는 우에서 좌로 힘까지 홱하고 밀듯 돌리면, 라디오 주파수를 가리키는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게 뭐가 신기하냐고?

일단 다이얼은 아무리 세게 돌려도 힘없이 휭휭 돌아가지 않고 묵직하지만 부드럽게 그리고 천천히 돌아간다.

다이얼이 돌아가면 바늘에 속도 조절기가 달려있는 것처럼, 멈추기 전엔 속도가 서서히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마치 브레이크를 조금씩 천천히 밟아서 차가 서서히 멈추는 것처럼 말이지.

아무튼 나는 꽤 오랫동안 아버지의 마란츠의 전원을 켜지 않고도 오디오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10대 중반을 넘어가서야 아버지는 드디어 내게 마란츠를 공유해 주었다. 그때부터 마란츠는 더 이상 엘비스도 바카라도 아닌 금속성의 록음악과 헤비메탈을 감당해야만 했다.


사라진 마란츠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20대 중반. 내가 하고 있던 밴드의 매니저가 집에 방문을 했다. 그리고 발견한 아버지의 마란츠. 집에 가져가서 꼭 한 번만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며 간청을 했다. 그날 저녁 난 탐탁지 않아 하던 아버지를 기어코 설득했고 다음날, 매니저는 아버지의 마란츠를 차에 태우고 떠났다.

하루만 테스트를 하겠다던 매니저는 차일피일 미루더니 한주가 넘고 한 달이 넘도록 아버지의 마란츠를 가져오지 않더니 급기야 잠적을 해버렸다.


아버지의 유품

매니저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 문제로 나는 밴드를 떠났고 한두해 후 급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마란츠가 있던 자리가 비었있음을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에 머리를 쥐어박으면서도, 동시에 아버지의 마란츠를 훔쳐가 버린 매니저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 나쁜 XX가 아버지의 유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미칠 것만 같았다. 사실 마란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마란츠 사건이 있기 한참 전 이야기인데, 매니저가 계약서를 써야 하니 인감도장을 가져오라 해서 가져다줬다. 그랬더니 계약서는 있지도 않고 나 몰래 수천만 원에 이르는 밴드 차량을 내 명의로 구입했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고 이것만으로도 어처구니없는 일인데... 세상에....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내 이름으로 거액의 할부금이 집으로 청구되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걱정을 하시면서도 내게 묻지도 않고 몇 년 동안 차량 할부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으셨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느 날 당장 인감도장과 차를 가져오라고 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는 내 명의로 된 밴드차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끝이 아니지.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참고 어째 저째 매니저를 찾아가 만났더니 차는 이미 팔았는데 돈은 다 썼다고 배 째라고 한다. 아이코 어쩌다 글이 이렇게 엉뚱한 길로 들어섰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마란츠는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한테는 너무나 죄송해서 말도 꺼내고 싶지 않지만... 아직까지 아버지의 마란츠를 돌려받지 못했다.

아버지의 최애장품이자 내 어릴 적 장난감이었던 아버지의 마란츠는, 사람을 쉽게 믿은 내 죄로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아버지 죄송해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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