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바닷가 모래사장은 알 수 없는 풀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오직 한 종류인 그 풀들은 바짝 말라 갈색을 띠고 있었고 모래바닥에 바싹 붙어 옆으로 퍼져있었다. 아마 거센 바닷바람을 피해 생존하려고 그런 모양새로 자란 난 것 같았다. 무슨 풀일까. 바닷가에서 핀다는 해당화? 함초? 온 모래사장을 가득 메울 만큼 무성한 걸 보니 필시 귀한 풀은 아닐 테지. 그리고 여긴 분명 해수욕장인데 이렇게 촘촘하게 모래톱을 장악한 걸 보면 사람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인기가 없는 해수욕장인가. 생각하며 바다를 찍기 위해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하늘은 잔뜩 흐려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고 바람도 꽤 불었다. 음산한 날씨가 인적 없는 해변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더 운치 있게 다가왔다. 우연히 한 사람이 멀리서 앵글에 잡혔다. 쓸쓸하고 단조롭기만 한 풍경에 그 한 사람의 실루엣은 사진에 아연 생동감을 선사했다. 마침 여자분이다. 그렇지. 해변엔 여인이 제격이지.
연거푸 몇 번 셔트를 눌렀다. 너무 멀어서 누군지 알아 볼 수도 없고 더구나 뒷모습이니 실례가 되진 않겠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훌륭한 모델이 되어주신 그분께 감사의 마음이 우러났다.
풀을 밟으며, 파도가 밀려와 모래톱과 만나는 곳까지 걸어갔다. 파도로 단단해진 모래톱은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고 신발을 벗고 파도의 간지럽힘까지 느끼고 싶진 않았다. 어릴 땐 그렇게 바다에 가면 물에서 나올 줄을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물에 몸을 담그기가 싫어졌다. 바닷가 도시에 살 적에도 가족들이 모두 바다에서 물장구를 쳐대도 홀로 해변 파라솔 밑에 꿋꿋이 안자 짐들만 지켰었다. 바다는 그저 바라볼 때 아름다운 것일 테니...
파도가 매끈하게 닦아놓은 모래 위를 발자국을 남기며 걸었다. 부지런한 파도는 금세 내 발자국을 지우고 다시 말끔하게 모래를 정리했다. 마치 지나간 것은 잊으라는 듯 그렇게.
'파도를 만드는 것이 바다의 일이라면 당신을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라 했던가. 바다가 쉴 새 없이 파도를 만드는 것만큼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바람이 계속 불었다. 도무지 차갑지 않은 11월의 바람이.
힘든 기억 아픔까지도 짙은 바닷속에 던져버리고 부는 바람에 날려버리고 싶었다. 저 끝 닿는 곳까지 걸어가면 파도가 다 싣고 가줄까.
바다에서 비우고 다시 얻은 힘으로 또 열심히 살아보라고 파도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약속할게. 철 지난 바다가 준 힘으로 더 씩씩하게 살아볼게.
저 모래사장의 이름 모르는 풀들처럼 옆으로 납작 누워서라도 단단히 붙들고 있어 볼게.
약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