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눈물이 나다니
그와 물리적으로 떨어진지 10개월이 되어가고, 법적으로 싱글이 된지도 6개월이 되어간다. 초스피드 이혼과 집정리, 이사 등 정신없는 일들이 지나가고 나에게 커다란 공허가 남았다.
행정 처리를 하느라 미처 돌보지 못한 마음을 애써 추스르고 있었다. 이제 새로운 삶의 터전에도 많이 익숙해졌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기분이 괜찮았고. 제주의 좋은 카페들과 맛집을 섭렵하며 가면 없이도 웃는 날들이 있었다. 그러다가도 비가 오거나 일이 바쁘거나 하면 텅 빈 마음과 괴로움이 가득차 밤바다를 혼자 서성이곤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혼 때문에 우는 날이 사라졌으니.
서귀포로 외근을 가는 날이었다. 비가 많이 왔다. 종잡을 수 없는 제주 날씨도 좀 익숙해져서, 빗소리가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운전하다 신호가 걸려서 휴대폰 알림창을 확인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너. 내가 OOO하고 불륜해서 이혼했다고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녔어?
순간 이게 무슨 말이지? 하다가 깨달았다. 그가 회사 동료들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곧바로 나에게 따지려 연락한게 뻔했다. 비가 쏟아지고, 사고가 정지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운전을 했다. 어떻게 대응해야하지. 나는 동아줄 잡는 심정으로 함께 차 안에 있던 동료에게 자문을 구했다. 갑작스러운 나의 변화에 당황하던 동료는, 지금 그와 어떤 연락을 하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고 상처만 받을게 뻔하니 읽지말고 차단하라는 현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지는, 익숙한 공황 증세가 찾아왔다. 동료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 차를 세우고 숨을 골랐다. 단칼에 카톡 친구를 차단했다. 그리고, 그의 영향력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생각을 바꿨다. 도망치자. 차라리 일에 집중하자. 나는 업무 통화를 하기 위해 휴대폰 수발신 기록을 열었다. 거기엔 내가 차단한 그의 전화번호가 연달아 찍혀 있었다. 차단한 상대가 전화를 하면 벨이 울리지 않아도 기록은 남았다. "차단 상대 기록 안보기" 기능을 눌러야 했는데, 몰랐다. 전화가 찍힌 횟수와 카톡 알림창으로 짐작컨대, 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상태였다.
외근을 마치고, 비를 뚫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쳤다. 그는 뭐가 억울했을까. 염치없이 나에게 득달같이 따질 정도로 나는 함부러 화내고 따져도 되는 존재였을까. 나는 얼빠진 상태로 자리에 앉아 사무실 PC를 켰다. 그리고 입이 벌어졌다. 사내 메일과 메신저에 그의 연락이 많이, 많이 와 있었다. 내용은 비슷했다.
너 내가 OOO이랑 불륜해서 이혼했다고 사람들한테 말하고 다녔어?
이렇게 나를 매장시켜야만 했어?
이렇게까지 해야했어?
왜 연락 안받아? 답장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아랫사람 혼내듯 다그치는 그의 뻔뻔함에, 잘못은 본인이 저질러놓고 다 나때문이라는 그의 억울함에, 하고싶은 대로 하고 책임은 안지는 여전히 비열한 그 밑바닥에, 나는 내가 미친놈을 만나도 대단히 미친놈을 만났었구나, 하고 남은 정과 좋은 추억까지 다 쓰레기가 되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동안 너무너무 아팠는데, 이제 간신히 괜찮아지고 있었는데,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발목을 잡고 진창으로 잡아끄는 그의 행태가 기가 막히고, 너무나도 슬펐다.
나는 답장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 채로 살아. 뭐가 그렇게 억울하고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고 싶어서 나한테 연락했니. 나는 널 생각해서 지금껏 말하지 않고 참아왔는데(나는 폭로할 거리가 더 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이렇게 먼저 연락하다니 넌 염치가 없다.
그에게 답장이 왔다.
니가 사람들한테, 내가 OOO이랑 불륜해서 이혼했다고 말하고 다녔냐고 물었어.
내 말에 어떠한 반응도 없이, 본인의 용건만 전하는, 오만하고 방자한 말투. 지가 다그치면 내가 바르르 떨며, 예전처럼 너의 안색을 살피고 니가 상처받을까 두려워하며, 그래, 내가 그랬어 하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을까. 내가 결혼 생활 동안 그의 모든 단점을 덮고 사랑으로 감싸줬던 이유는, 내가 말도 안되는 시간들을 참았던 이유는, 내가 그에게 호구였던 이유는, 그가 내 남편이었기 때문에, 내 가족이었기때문에,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와 나 사이에 진심이 있었다는 걸 위안으로 삼으며 지난 시간들을 아까워 하지는 않았다. 이혼을 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음에 과거의 나 자신에게도 관대하려 노력했다. 온갖 나쁜 생각이 머릿속에서 부풀었어도, 안그러려고 노력했는데.
나는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답장을 했다.
누가 그래? 틀린 말은 아니네. 근데 그여자랑 진도는 안나갔다며.
나 할말 정말 많은데 내가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내 결혼과 이혼이 어땠는지 다 말하는 거 보고싶지 않으면 이쯤하고 다시는 연락하지마.
마지막 답장을 보내고. 정말로 그의 카톡과 전화를 전부 깨끗하게 차단하면서, 나는 그가 어쩌면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에게 "그래 내가 말하고 다녔어"라는 답변을 듣고 법적 증거로 사용하지 않을까. 그리고 법적 조치로 가지 않는다면 회사의 인사 담당 부서를 통해 나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하지 않을까.
진흙탕 싸움이 시작된다면, 나는 내가 쥐고 있는 패들을 아낌없이 공개할 생각이 있다. 그리고 그건 그를 정말 사지로 몰아넣는 일이 될 것이다. 나를 치료했던 정신과 의사와 내가 조언을 구했던 변호사들도 내 얘기를 들으며 혼인 무효 소송을 하자고 했었으니, 내가 완벽한 피해자이며 절대적인 승자가 될 것이 확실하다.
다만 내가 지금껏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는, 정말 그사람이 잘못되길 바라지 않아서였다. 하나하나 기억을 헤집어 내 상처를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도 않았지만, 내 폭로로 인해 그가 상처받는 것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가 잘못된 생각을 할까봐 참아왔다.
그런데 이렇게 참아온 덕분에, 나는 바람을 피워 제주로 도망갔다는 누명을 쓰고, 그가 간부들을 찾아다니며 본인이 피해자라는듯 '종교적 사유로 이혼했다'고 말하고 다니는 통에 우리 부모님은 종교를 강요한 사람들이 되어버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부모님과 내가 그에게 종교를 강요한 적은 하늘에 맹세컨대 한번도 없으며, 난 지금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
싸움을 걸어 온다면 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와 정신적 바람을 피웠던 그 여자도 내 의부증으로 이혼에 휘말렸다고 억울해하고 있을 테고. 아마 나에게 연락을 취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에겐 팩트가 있어서, 대응할 말이 참 많다.
그런데도 너무너무 아프다. 조금 아물어가던 상처를 다시 칼로 쑥쑥 쑤신것 처럼 아프다. 나는 오랜만에 그 기억 때문에 다시 울었다. 멍청하게, 어줍잖게 자신의 억울함을 나에게 화풀이하고자 연락했던 그 때문에, 다시 이렇게 상처가 난다.
나는 이렇게 텅빈 가슴을 안고, 손에는 그를 제압할 수 있는 무기를 들고, 상처에 피를 흘리는 채, 맨몸으로 전쟁터로 나가겠지. 나는 이길 것이 분명하면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