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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혼 극복 일기, 1년이 지났다.

텅 빈 마음을 끌어안는것

by 소금빵

일년이 넘어간다.


일년 전 이맘때, 나와 평생을 약속했던 사람은 이혼을 말하고 집을 나갔고, 나는 신혼집에 혼자 남아 짐이 얼마 남지 않은 서랍장을 정리했다.

한번만 더 얘기하자고 간곡히 부탁한 끝에 집 근처 공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 조근조근하게 너를 사랑하지 않아, 집은 당장 내놓자,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하던 너의 말을 들으며 내가 좋아하던 네 향기는 더이상 나를 안아주지 않는구나. 이렇게도 마지막이겠구나, 담담히 가늠했다. 자존심이 상해 그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놓고, 빈집에 돌아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마음을 다 줘버려 내가 텅 빈것 같다.


일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잘 살아보려고 애쓴데 비해 얼마나 많이 나아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도 꿈속에 네가 나온다. 어떤 표정도 없이 울부짖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나는 악을 쓰다 잠에서 깬다.


시간은 여기까지 잘 흘러왔다. 나의 상태와는 상관 없이.

평소의 나는 마냥 우울해하거나 상처에 허덕이지도 않는다. 좀 공허할 뿐이다. 그래서 그냥 뭔가 많이 했다. 운동도 세네가지를 해보고, 피아노도 배웠다. 해지는 바닷가를 하염없이 걸었고, 일도 열심히 했다. 술도 많이 마셨다. 정상인의 모습은 제대로 갖췄다. 다만 마음에 구멍이 난 것 같고, 사람 사이에 사랑이라는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다.


한밤중에 귀가할 때면 아파트들이 내려다보는 주차장 한가운데 혼자 서성일 때가 있다. 불켜진 아파트를 바라보며 다들 집으로 돌아와 쉬고 있는데, 나도 예전엔 집이 있었는데, 나는 지금 어디까지 도망 온 걸까, 다시 돌아갈 곳도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한다.


부모님과 같이 사는 것도 편안하지 않다.

예전에는 부모님과 있는게 편안했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 그게 죄책감이 크다. 편안하려면, 내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 시커먼 마음을 다 까버리면 부모님은 다시 속상할게 뻔하다. 조금만 내가 짜증을 내도 혹시나 내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해 또 저러나, 걱정하는게 눈에 보여서 무엇도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다. 예전처럼 부모님과 내 사이는 좋지만, 나는 내 밑바닥을 사랑하는 내 엄마아빠에게 다시 공유하며 다시 그들에게 상처입힐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된 것이다.

사랑받는 딸이고, 솔직한 자식이었는데, 덕분에.


그의 근황을 들었다.

서울에서 잘 산다고 한다. 부서를 옮겼는데, 불미스러운 일로 이혼했다는게 소문이 났고 본인은 굉장히 억울해했다고 들었다. 그 여자와는 더이상의 진전 없이 끝났고, 여기저기 추근대는 그 여자의 행실도 여전히 들려온다. 차라리 모르면 좋으련만.


올해 초에, 나는 차를 바꾸고 싶었다.

내 차에는 추억이 너무 많았다. 사회 초년생일 때, 그가 내 남자친구이던 시절, 처음으로 차를 사서 같이 타보고, 트렁크 열고 앉아 바다도 구경하고, 음악도 실컷 들었던, 그리고 지난 1년간 내 눈물을 제일 많이 숨겨준 내 차. 내가 너무 사랑했던 내 차.

안좋은 기억이 너무 많아서 차를 당장 바꾸고 싶었는데, 그가 요구한 재산 분할을 맞춰 주느라, 그 독촉을 더이상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가진 돈을 다 처분하고 빚을 내느라 차를 바꿀 수 없었다. 이제 줄 거 다 줬으니, 나도 이제는 뭐라도 차를 바꾸려고 한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게 이런 거밖에 없으니, 냥 빚 낸다. 장 1-2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할 기운조차 없다.


다음 달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간다. 늘 친구나 부모님, 남편과 함께 했었는데, 이렇게 오롯이 혼자 떠나는 여행은 처음이다. 낯선 나라에 가서 뭔가를 보고 경험하고싶다기보다, 홀로서기를 제대로 해보고 싶어 결정했다. 직장을 다니는만큼 쉽지 않았지만, 다녀오면 뭔가 혼자가 된 내 삶도 레벨업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조금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날짜를 세고 있다.


한때는 명랑의 아이콘이던 내가, 요즘은 주변 사람들이 은근히 안부를 묻는 존재가 되었다. 어떨땐 소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값싼 이야깃거리가 되어 소비되고, 다루기 어려운 자식이 되었다가. 왔다갔다한다. 이젠 나조차 내가 어려워졌다.


내 동생이 결혼을 한다.

내 동생은 내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존재인데, 나로 인해 잘난 내동생한테 흠집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상대 여자 집안에서 이혼한 누나를 어떻게 볼지, 상견례를 앞두고 착잡한 마음도 크다. 그쪽에서 뭐라 생각할지도 갑갑하고, 뭐라 말해봤자 변명뿐인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다.


자기 혐오와, 사랑에 대한 혐오가 똘똘 뭉쳐 나의 생기를 앗아갈 때, 나는 무력하다.

이제는 교회도 나가지 않는다. 기도도 하지 않는다. 가끔은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길, 가끔은 내 마음을 만져주시길. 멀쩡하게 살려고 에너지를 다 쓰고 지쳐 누울 때면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신을 찾아본다. 그와 헤어진건 신이 나를 도우신 거라는 그 말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아픈건 아프다. 나는 아직도 일어나 기도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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