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끼는 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왔다. 비엔나는 정말 좋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길가에 많다. 본인이 들고온 악기에 최선을 다해 에너지를 싣는다. 심취한 그들의 표정은, 누가 돈을 주면 좋기는 하겠지, 하지만 지금 연주하고 있는 음악이 먼저다,는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이 참 멋지다.
호텔에 있는 바에 나왔다.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자연 채광이 안락하고, 누가 들여다보지 않는데도 나무와 꽃을 가꾸는 직원이 있는 공간이다. 손님들은 투숙객들이 대부분인데 대낮이라 사람이 거의 없다. 나는 기차에서 백지를 펼쳐두고 있다가 뭔가 손으로 쓰고 싶어서 휘갈긴 것을 정리해 여기에 옮겨 적는 중이다.
여행 오기를 참 잘한 것 같다. 집에서는 누가 뭐라하지도 않는데 내가 실패자, 아픈 손가락, 혹은 천덕꾸러기처럼 느껴졌다. 가뜩이나 동생이 결혼을 한다는데, 난 내 동생의 흠처럼 느껴졌다. 그럼 여태껏 달려온 나는 도대체 뭔가 싶어 들끓는 자기 혐오가 고통스러웠다.
근데 내게 익숙한 곳을 떠나보니,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게 되었다. 나는 낭만을 즐길 줄도 알고, 바쁜 여행지에서 이렇게 틈을 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쓸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나 못난 존재 아니고,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지. 여행기간 내내 깨달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여기 와서는 몸은 고되도 기운이 좀 도는 것 같다.
무너져도, 또 실패해도, 다르게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정말 오랜만에 해본다. 어차피 내 인생엔 예기치 못한 슬픔들이 또 있을 것이고, 나는 또 살아내겠지. 라는 의욕적인 느낌도 고개를 슥 든다.
여행을 올 때마다 생각하는건, 여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거. 헝가리도 비엔나에서 몇시간이면 기차타고 갈 수 있는데, 괜히 복잡하게 생각해서 안간것 같다. 아무튼 나한테 여행은 준비할 게 많지만 공부한 만큼 남는 것이라 참 좋은 경험이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니까,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여행하며 늙어가는걸 꿈꿨다. 지금껏 남편과 가려고 아껴둔 여행지가 많은데. 어차피 글렀으니 아끼지말고 좋은 곳 생각나면 아끼지말고 혼자 열심히 다녀보련다.
그동안은 인생의 방향을 다시 세울 에너지가 방전되었고, 계획을 해봤자 엎어지는것 아니냐 싶은 마음으로 살았다. 내 인생의 모토는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였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나앉은지 1년이 넘어간다.
그런데 이렇게 차분히 앉아 시간을 가져보니, 방향이 또 무너져도 다시 세우면 나만의 싸움을 이기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스물스물 드는게, 나 스스로도 좀 놀랍다.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조금은 회복 되었고, 이제는 진정 긴시간 나를 괴롭힌 일들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낯선 나라에 와서 길 잃지 않고, 큰일 안당하고 잘 찾아다니는 내모습을 보니 자존감이 좀 차고, 이곳 해가 좋아서인지 마음도 좀 채워지는 느낌이다.
이혼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혼이 어떤건지 모르며, 나도 나보다 더 깊고 진한 헤어짐을 해본 사람들의 상처를 다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는 말수가 더 줄었다. 혹여나 남에게 상처를 줄까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내가 쉽게 한 말들에 쉽게 베였고, 예민해진 마음에 흔적이 남았으니까.
나는 말을 줄이는데, 직장에서 오가며 애매하게 친한 사람들은 시간이 좀 지났다고, 별 의미 없이 새로운 사람 만나라는 말을 한다. 그에 대한 FM스러운 대답을 그동안 못찾은것 같다. 솔직한 대답이 뭔지 고심해볼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불안하기는 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생각도 대비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재혼(아직도 이 단어가 나에게 와닿지 않는다)을 위해 박차를 가해야할지 뭘 어째야할지 몰라서.
이제는 좀 내려놓은 것 같다. 누구를 사랑하고싶지 않다. 변할지 모르는 상대의 마음에 나를 배팅하고싶지 않다.
그토록 오래 알았고 오래 믿어온 사람도 나를 배신하는데. 어떤 사람에게 내가 마음을 열 수 있을까.
다만, 이 시간들을 지나며 깨달았다. 나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일은 나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아껴주는건 어떻게든 남더라. 어쩌면 내가 오랜 시간 고통받은 이유는, 나를 사랑하는 마음까지 남을 사랑하는데 다 써버려서, 나를 돌보는 방법을 잊어버려서가 아니었을까.
유럽이든 어디든, 내 눈에만 그럴지 모르겠지만, 노부부가 두손 꼭 잡고 여행 다니는 모습을 볼 때면 참 예뻐보인다. 나도 그렇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내 몫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나니 보기엔 예뻐도 더이상 마음이 아프거나 부럽지는 않다.
나는, 열심히 살아와서, 다시 태어나고싶다는 마음은 없고, 그럴 기운도 없다. 그러니까 굳이 결혼을 또 해서,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고, 며느리가 되어, 구태여, 이 선물인지 짐인지 모르겠는 인생을 더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자 그럼, 앞으로 남은 긴 시간, 오래도록 즐겁게 살다 미련없이 떠날 수 있는 죽음을 준비해볼까. 주변에 폐끼치지 않고, 혼자 즐겁고 재미나게 살다 너무 늦지않게 잘 죽으려면 할 일이 많다.
이제는, 글쓰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지. 항상 잘 입고, 좋은 장소를 찾아다니며, 좋은 음악을 들어야지. 정신과 치료 대신 시작한 피아노도 오래도록 함께하며 더 나은 연주를 위해 고민할거다.
나는 이제 내 이야기를 쓰는 것 같다.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는, 어쩐지 꼭 그렇게 살아야 할것만 같은 그런 삶 말고, 묵묵히 나만의 길을 혼자 걷기 시작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