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걸 다 버리고 조금 가벼워졌다
강풍 특보다. 눈까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피아노 연습실에서 죙일 시간을 보내다 갑자기 차를 탔다. 낭만에 죽고 낭만에 사는 나. 날씨에 굴하지 않고 선흘 산골짜기로 케이크 먹으러 나왔다. 막상 도착하고나니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돌아갈 길이 걱정인데, 덕분에 카페 안에 있던 커플들이 부랴부랴 눈을 피해 도망가는 바람에 조용하게 나만 남았다. 결말은 아직 모르지만 얻어 걸린 행운이다.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을 감당하고 있다.
작년 겨울에는 끊임없이 죽고싶었다. 사는게 버겁고 즐겁지 않았다. 숨이 붙어있으니 살긴 살아야겠는데 가족, 직장, 건강관리마저 모든게 짐같았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혼율 높은 우리 나라에서 이혼 그거 별것 없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 싶으면서도, 이혼으로 바뀐 내 인생을 감당하는게 힘들었다.
일도 예전만큼 잘 안되었다. 충격으로 뇌에 데미지를 입었는지 기억력 감퇴에 시달리는 내가 낯설고 답답했다. 세상도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상처를 받았든 아니든, 세상은 아랑곳않고 나를 흔들었다. 이상한 상사를 만나 제주에서조차 휴직을 해야하나 고민을 했다. 나는 계속 흔들렸다. 누군가 니까짓게 언제까지 버티겠냐 말하는 것 같았다. 매일 남몰래 날밤을 지새고 두통에 시달렸다. 그러다 내가 이혼했다는 사실은 모른채 서울에서 안부를 물어온 옛 동료와 전화 통화를 하다 호흡곤란이 왔다. 어디 심각한 사고로 외상이 커 응급실을 찾는 심정으로 또 정신과를 찾았다. 세상이 나를 또 건져낸다. 좋은 의사를 만났다.
편안한 차림의 의사는 서초에서 왔단다. 법원 근처에 병원이 있어 이혼에 얽힌 환자들을 많이 봐왔다고 말했다. 어줍잖은 위로나 성희롱도 안했다(난생 처음 찾아간 정신과 의사는 얘기를 듣자마자 남편과 성적인 부분이 안맞았나보군요,라고 했다). 그는 가만히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탓이 아니라고, 인간같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 것 뿐이라고 말해줬다. 약에 예민한 체질이라 정신과 약 또 먹기가 무섭다고 말하자 약한 항우울제와 수면유도제를 처방해줬다. 그 약을 먹고 나는 몇달만에 잠을 잤다.
홀로 되고 나니 그 누구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믿었던 부모님마저 의지가 되지 않았다. 내가 화목한 가정을 꾸려온 내 부모는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다는것을, 그간 깨달았다. 남의 사연에도 기댈 수 없었다. 이별은 많아도 당연하게도 나랑 똑같은 일을 겪은 사람은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같은 사연은 없다. 내 심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세상에 딱 하나, 나 자신이다.
꽤 긴시간동안 매일 약을 먹었다. 내가 항우울제를 복용중인 것을 가족들은 모른다. 하루하루 사는것도 겨우 해내느라 말할 기운이 없었다. 야근을 하고 회식을 하고 술을 먹어도 정해진 시간엔 꼭 약을 먹었다. 약에 의지하는 내 모습이 비참해도 깨어 있는게 괴로워 열심히 약을 먹었다. 한숨도 자지 못했던 날을 지나 규칙적으로 자기 시작했다. 죽고싶다는 생각도 줄다가, 잊어버리다가, 사그라들었다. 활활 타올라 미쳐 날뛰던 신경계가 이제는 태울건 다 태워버리고 뼈대만으로 곱게 남겨진 기분이다.
나는 그렇게 모든걸 포기했다. 내가 당연히 가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과, 내가 가졌던 모든 것들. 정서적, 경제적인 것. 미래. 건강한 정신. 잘 먹고 잘 사는 하루.
사랑하는 사람과 주말에 같이 밥해먹고 산책하는 것, 알뜰살뜰 돈모아 어디로 이사를 갈지 식탁에 앉아 머리 맞대고 고민하는 그림, 서로를 반씩 닮은 애기를 낳아 입에 뭐라도 넣어주려 애쓰는 모습, 서로의 생일에 아껴왔던 쌈짓돈으로 하는 작은 이벤트, 해외로 여행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서로만 의지하는 일.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커리어를 쌓고, 때가 되면 승진하는 것.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것.
내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고쳐보려는 욕심. 좋은 딸이 되려는 노력.
포기하고 나니 편안해졌다. 약도 필요한 날이 아니면 찾지 않을 정도로 가벼워졌다. 오롯이 혼자가 되어, 꽤 고독하고 꽤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이 나를 흔들면 흔들리고, 세상이 나를 의외로 지켜주면 또 잘먹고 잘 살겠다고, 올해 모토는 '오늘만 살자'로 정했다.
일이 터지고 나니 내 주위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드글거린다. 이혼의 이유도 가지 각색이고, 사별과 이별이 난무한다. 우리가 하는 말은 다 똑같았다. 대체 언제 괜찮아질까.
이만큼 자라서, 나는 조만간 또 흔들릴 나를 위해 남겨둔다. 거스르지 말자. 내가 당연히 행복할거라는 생각도 하지 말자. 모든게 잘될거야, 그런건 없다. 그냥 딱 하루만 잘 지내자. 애쓰는 나를 위해서 살자. 나마저 나를 부끄러워하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