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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선 최금희 Feb 21. 2022

엄마의 첫사랑, 나의 짝사랑

가슴 깊이 간직된 20대의 풋사랑

영화 "초원의 빛"을 보고 풋사랑을 떠올렸다.




요 며칠 몸이 너무 과로하고 감기몸살까지 겹쳐서 누워있었다. 열은 며칠째 올랐다 내렸다 하면서 나에게 장난한다. 아마도 며칠 전 부산에서 선배가 찾아와서 집 근처에서 식사를 하러 나갈 때 너무 옷을 가볍게 입어서 약간 추위를 탄 탓인 것 같았다.  설마 코로나19  증상은 아니겠지... 웬만해서는 병원을 안 가는 성격도 고쳐야 하는데 오늘 밤도 아프면 내일은 꼭 병원을 가든가 코로나 검사를 받던가 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다.


당장 목요일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독서 발표할 ppt도 만들어야 하는데 다 귀찮아서 온종일 누워있다가 오후에 텔레비전을 켜고 무료 영화를 살펴보았다. 사실 나는 독서광이지만 영화광이기도 하다. 특히 클래식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오늘도 내가 고른 무료 영화는 나탈리 우드의 첫 주연작이었던 1962년 "초원의 빛"이었다. 한국에 정착해서 언젠가 30대에 한 번 본 적 있는 영화가 40대 후반인 오늘 왜 그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는지~~

영화의 주인공 버드와 월마는 고등학교 학생이자 서로 사랑하는 사이다. 부잣집 도련님인 버드는 가난한 집 월마를 너무 사랑하지만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정숙한 교육을 받으며 살아가는 월마는 버드와 키스 이상의 진도를 부담스러워하며 거부한다. 그렇게 이성에 대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월마로 인해 버드는 고통스러워하다가 얼결에 다른 여학생과 육체적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소문을 들은 월마는 충격으로 정신쇠약에 걸리면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된다.
몇 년이 지나 월마는 퇴원해서 고향에 돌아와서 아직도 버드를 잊지 못해 친구와 부모님을 졸라서 버드를 찾아간다. 그동안 버드는 아버지가 주식이 폭락하고 자살하면서 집안이 어려워지고 월마의 친구인 안젤리나와 결혼해서 애까지 키우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월마는 마지막으로 버드를 찾아가서 서로의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지만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영화가 끝난다.
영화 배경이 1920년데 미국 캔자스의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자유분방한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했던  미국 청년들의 그 시절 순수함에 놀라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월마가 안쓰럽고 불쌍했고 나의 풋사랑도 떠올리게 되었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정숙함을 미덕이라고 배웠던 나의 고교시절과 처녀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쯤 어느 날 학급의 한 남학생이 하교해서 아파트로 들어서는 나의 앞길을 막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동네 사람들이 볼까 봐 계단 말고 복도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친구와 승강이질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복도를 올라가던 오빠가 내 목소리를 듣고 달려와서 그 친구 앞에서 나를 끌고 다짜고짜 집으로 끌고 들어가서 귀뺨을 때렸다. 그때가 오빠에게서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은 따귀 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주위의 친구들은 다 연애를 하는데 졸업하고 보니 나만 남자 친구가 없는 것이었다. 그 이유를 지금도 알 수 없다. 친구들에게 들어보면 자기 남자 친구들이 누가누가 금희를 좋아한다고 하던데 안 찾아왔냐고 내게 물었으니까. 나중에 내가 물어보니 나는 당연히 남자 친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거절당할 가봐 찾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연애는 경박한 행동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탈북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연애를 한 번도 못했다. 독자 여러분께서 믿거나 말거나 ㅋㅋㅋ(당시 북한은 고등학교까지는 연애를 적당히 눈감아주었지만 대학교나 군 복무 기간에 연애를 하면 커플 쌍방이 퇴학당하거나 생활제대되어 주변에 망신살을 당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에게도 오랜 세월 가슴 깊숙이 간직해 온 한 남자에 대한 풋사랑 같은 감정이 있다. 20대 초반 친구의 오빠를 남몰래 짝사랑했다. 그는 철현이라고 내 친구 혜련의 오빠였는데 내가 보기에 그 오빠도 나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나의 마음을 알아채기나 한 듯 혜련이가 나에게 여자가 남자를 먼저 좋아하는 경우를 보면 정말 어처구니없다고 푸념하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열 살 연상인 친언니에게 나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그런데 언니도 대뜸 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여자가 먼저 남자를 좋아하는 거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좀 더 지켜보자고 했다.


그렇게 나는 4살 연상인 철현이를  볼 때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면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시기 나는 그 오빠를 너무나 그리워하다가도 어쩌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 오히려 눈길을 피하면서 남몰래 짝사랑을 키워갔다.  한 2년쯤 지났을까 어느 날 오빠가 내가 아는 복실이라는 언니랑 상견례를 마쳤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문을 들은 그날 저녁 집에서 나는 식구들 앞에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어머니와 오빠는 여적 남자라곤 사귀지 않고 범생이던 막내가 속상해하니까 당장 철현에게 가서 정말 약혼한 거 맞는지 확인해보겠다면서 나를 달랬다. 나는 "이미 상견례까지 마쳤다잖아, 엉엉 흑흑..." 하며 며칠 동안을 통곡했다.


엄마의 이루지 못했던 첫사랑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상심에 빠진 나에게 어느 날 어머니는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사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7년을 연애했던 연인이 있었단다. 6.25 전쟁시기 국군과 미군이 나의 고향 청진까지 올라왔을 때  피난을 갔던 산에서 알게 된 집에서 어머니를 며느리감으로 욕심냈었다고 한다. 그때 그 집 작은 아들은 불행하게도 전사하고 큰 아들은 거제도에 수감되었다가 포로교환으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다. 정전 후 나의 어머니는 의대를 다니면서 살아서 돌아온 그 집 맏아들과 연인사이로 발전했고 의대를 졸업하면 결혼을 하기로 양가가 결정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지금도 병명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그때 어머니는 대장 80센티미터를 잘라내는 큰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를 나을 수 없다는 의료진의 판정을 받게 되었다.


예비 시어머니는 태도가 돌변하여 대를 끊기게 할 순 없다면서 파혼을 요구하셨다. 어느 날 나의 어머니와 자기 아들을 집으로 불러서 식칼을 앞에 내놓고 너희 두 사람이 헤어질 거냐, 아니면 이 자리에서 내가 죽을까 하면서 최후통첩을 하더란다. 순간 어머니는 7년간 사랑을 익혀왔던 연인과 눈물을 머금으면서 헤어지셨다고 한다.


가슴 아픈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시면서 어머니는 나에게 7년이나 사귀던 사람과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이별을 했는데 넌 하물며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은 고깟 짝사랑 때문에 밥도 안 먹고 무슨 상사병이냐고 하신다.  


난생처음 알게된 엄마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분을 이후  한번도 만나지못했냐고 물었다. 훗날 그분이 결혼해서 딱 한 번 아픈 아이를 치료받으러 소아과 의사인 엄마를 찾아온 적 있었다고 한다. 그땐 어머니도 학자인 나의 아버지와 가정을 이루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었고 그 분은 어머니와 결혼하지 못한걸 평생 후회하며 살았노라 하더란다.


 참고로 나의 부모님은 금술이 좋고 그 사랑이 너무나 애뜻하셔서 내가 14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평생 재혼을 하지 않으셨다. 그날 아버지처럼 멋진 남자를 만나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달래는 엄마의 품에 안겨 나는 서럽게 울었다. 그때 나는 다시는 사랑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막연한 결심마저 다지기도 했었지...


그 후 '고난의 행군'이라는 식량위기가 오고 끼니를 굶을 정도의 가난을 겪게 되면서 혜련 오빠와 복실 언니의 결혼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탈북하게 되었다. 처녀시절 순수했던 짝사랑에 대한 경험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지만 지금도 가끔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나도 누군가를 보고 가슴 두근거려본 적이 있었구나 하는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만족하게 된다.


지금 혜련 오빠인 철현이는 살아는 있을까? 혹시 우리 대에 통일이 되면 만나게 될 수 있을까? 혹 이미 그도 탈북해서 중국이나 한국에 있지 않을까? 등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초원의 빛"의 버디나 월마처럼 서로를 축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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