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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두진 Mar 09. 2021

건축가 이훈우의 진주 일신여고보

진주 사람들의 눈물겨운 학교 건립기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는 현 진주여고의 전신이다. 1920년에 개업한 건축가 이훈우가 개업 8년 만인 1928년, 그가 42세 되던 해에 이 학교를 설계했고 이어 1929년 1월 21일에 준공하였다. 1928년 3월 12일 자 조선일보는 '설계사 이훈우 씨와 경남도 영선과의 손으로 제도 설계 중'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완공된 학교 건물을 보면 아래 사진에서 처럼 중후한 느낌을 주는 벽돌조 건물이다. 다시 조선일보를 인용하자면, '본관 일백육십여 평 (상하층 전부 삼백이십여 평)'으로 동시에 건축 중인 대강당과 훗날 예정인 기숙사 확장까지 포함하면 '중등학교 교사로 남조선에서는 제일 장엄한 건물이 되리라'라고 예견하고 있다.     

이훈우의 건축을 논하려는 것은 이 글의 의도가 아니지만, 일본 건축가 친구들에게 이훈우의 건축 사진들을 보여줬을 때의 반응은 세제션, 즉 분리파적이라는 것이었다. 분리파는 원래 본격적인 근대건축의 형성 이전에 등장한 유럽의 여러 지역적 경향의 하나로 비엔나에서 시작되었다. 흥미롭게도 개항 이후 일본의 근대건축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인 1920년에 일본 분리파가 결성되었다. 나고야고공 출신 이훈우가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그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지만 이 부분은 훗날의 연구 과제로 돌리고, 다시 일신여고보 이야기로 돌아간다.


일신여고보는 건립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1920년대 초 진주 지역의 유지들이 모여 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우선 재단을 세우고자 했다. 이때 이훈우의 큰 형으로 진주의 유지였던 이은우도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제도로 규정된 모금액을 겨우 맞추어 1924년 '일신재단'을 설립, 부지를 확보해 땅을 다지기 시작했는데, 일본 식민 지배자들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공립학교를 짓는다며 재단 측에 부지를 제공하고 비용도 일부 부담할 것을 강요했다. '사립학교 재단의 재원으로 공립학교를 짓는다'는 비난이 빗발쳤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게다가 이 공립학교는 당초 일신재단이 추진했던 남학교였고, 식민 지배자들은 일신재단에게 대신 여학교를 세울 것을 종용했다. 남학생은 반일감정이 심할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결국 재단은 어렵게 구한 원래의 부지를 공립 남학교에 내주고 억울함을 달래며 대체 부지를 마련, 당시 서울에서 개업 중이었던 인근 하동 출신 이훈우에게 설계를 의뢰하였다. 이훈우는 1911년 나고야고공을 졸업한 후 조선에 돌아와 조선총독부 탁지부 세관공사과 및 토목국 영선과 등에 있으면서 부산중학교(1913), 보성고등보통학교(1914), 동덕여학교(19195) 등을 설계한 경험이 있었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조선일보 기사에서처럼 어떤 이유에서 경남도 영선과와 협력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그 경위는 확실치 않다.


그렇다면 이 건물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일신여고보의 후신인 현 진주여고는 아예 부지부터가 다르다. 지난 2021년 2월 19일 진주여고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관련 사실들이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날 밤, 하동의 한 숙소에 혼자 앉아 학교 측에서 대여해 준 여러 자료와 인터넷 검색을 대조해가며 그 과정을 추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일단 진주시의 지도가 필요하다.

지도의 1은 지역유지들이 확보하여 대지정리 작업까지 하고 있던 최초의 부지로 비봉산 남쪽 평지에 위치한다. 대지정리 작업을 담은 사진이 <진주여고팔십년사>에 실려있는데 뒤로 비봉산이 잘 보인다. 지금의 진주고등학교 부지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도면이 하나 등장한다. 진주여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으로, <재단법인일신고등보통학교본관>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이 도면은 훗날 이 자리에 세워진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건물과도 다르며, 이훈우의 설계로 지어진 일신고등여자보통학교 건물과도 다르다. 역시 건축적 특징을 논하려는 의도는 없으나 한눈에 보아도 일본풍의 근대건축임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분리파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은 누가 설계한 것일까? 이것도 이훈우의 설계일까?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시 일신재단이 원래의 부지에 대해 설계를 진행했으나 그 부지를 강탈당하고 새로운 부지를 구하면서 또 다른 설계를 진행했다는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즉 이것은 지어지지 않은 건물의 도면이다.

재단이 확보한 두 번째 부지가 지도의 2번이다. 원래 부지보다는 남쪽으로 이동했으나 그리 멀지 않다. <악양면지>에 의하면 '구한국 진영대 병영이 나라가 망한 후에 일본 육군 경리부 소유로 되어 있던 자리'였다. 흥미롭게도 재단은 아마도 일본에 대한 적개심 탓인지 이번 건물에는 전혀 일본풍이 들어가지 않을 것을 원했다. 그 결과 붉은 벽돌의 완전한 서양풍 건물이 지어졌고 여학생의 절개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모든 나무 부재는 각진 것을 사용했다는 일화도 있다. 만약 처음 도면도 이훈우의 것이라면, 그가 일본풍과 서양풍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지어진 건물의 모습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좌우 대칭의 견고하고 강직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이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학교 여학생들이 열렬하게 호응하며 시위에 나섬으로써 여학생들에 대한 식민 지배자들의 편견을 여지없이 날려버렸다고 전한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 재불 화가 이성자 선생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이후 학교는 또 다른 변화를 겪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부지를 구해 이사를 간다. 역시 비봉산 남쪽으로 지도의 3번이며 현재의 진주여고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해방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5년 3월 29일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2번 부지는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 금성초등학교의 전신인 금성국민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어느 정도 나이 든 진주 사람들은 저 건물을 금성국민학교 건물로 기억한다. (진주여고 방문 시 만난 현 진주여고 최진운 교장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지금 금성초등학교는 정작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즉 지도의 4번 부지에 가 있다. 1995년 9월 1일에 이전한 결과다. 


그렇다면 이훈우가 설계한 건물은? 위에선 언급한 것처럼 안타깝게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원래 '진주백화점'이 들어설 예정이었으나 1997년 소유업체가 부도나면서 2001년 금세기 유통이 인수, 포스코개발과 공사를 재개하여 2004년 4월 '마레제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 백화점도 처음부터 자금난에 봉착, 결국 '갤러리아백화점'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인구 30만이 조금 안 되는 중소도시 진주에서 과연 어떤 사회적 힘이 이 학교들을 여기저기 떠돌게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초기 근대 건축가 이훈우의 건물이 불과 20 몇 년 전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우연이지만, 2016년 3월 16일에 바로 진주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건축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이 때는 이훈우도 몰랐고 그 부지의 역사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이제 새로 알게 된 사실들이 놀랍고 우리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수많은 사연들이 그만큼 소중하게 다가온다.


현재의 진주여고는 부지와 건축 모두 이훈우의 설계와 관련이 없지만 그래도 어딘가 유사한 느낌을 준다. 학교에서 의식적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는 어디에선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사진 출처: www.doopedia.co.kr)

(*일신여고보는 새로운 부지, 즉 지도의 2번 부지에 교사가 완공되기에 앞서 임시 교사에서 학교를 개교하기로 했다. 빼앗긴 1번 부지를 차지한 공립 진주고등보통학교가 1925년 4월 완공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악양면지>에 의하면 '이에 분발한 일신재단은 도지사와 교섭하여 한국 정부의 경무부 자리며 일본 헌병 경남 본부터(전 세무서 자리)며 경상남도 공립 사범학교(특과 사범학교)의 옛 교사를 빌려... 1925년 4월 25일에 역사적인 개교를 보게 되었다'. 아래 사진이 그 임시 교사인데 그 위치가 현재 진주시 어디인지는 찾지 못하였다. 즉 진주여고의 긴 역사 동안 학교는 네 개의 부지를 거쳐온 것이다.)     


*참고자료

조선일보 뉴스 라이브러리

악양면지

하동군지

일신육십년사

진주여고팔십년사

진주공립고등여학교 제2회 졸업기념사진첩(소화16년 3월/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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