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6일 허인과 나눈 이야기
나에게만 열려있는 집이 좋아요. 누가 찾아오는 거, 돌아다니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 생각보다 많아요. 그리고 남과 셰어 하는 거 불편해요. 내 집은 전적으로 나만 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방이 따로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허인은 1971년생이다. 대한민국 인구 그래프가 가장 넓은, 바로 그 연령대이면서 정치적으로는 가장 진보적이라는 바로 그 세대다. 대입 때 100만 명이 시험을 봤다. 지방 출신이지만 삶의 반 이상을 서울에서 살아와서 이제는 고향으로 못 갈 것 같다고 한다. 주변 사람들이 요즘 들어 부쩍 집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확실히 '집이 화두'인 시대 같다고. 본인 역시 요즘 집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다. '왜 진작 집을 안 사서 내 이름으로 된 집도 하나 없을까'라는 생각과, '굳이 내 소유의 집이 왜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마음속에서 싸운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집을 소유하지 않아도 다들 그리 나쁘지 않게 살고 있다. 하지만 다들 불안한지 요즘 주식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린다. 정상적으로 살아서는 집을 구하기 어려우니까 그럴 것이다.
서촌의 레스토랑 두오모, 봄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 비추는 남쪽 창가에 앉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앞에 놓고 유난히 다채로운, 무겁기도 하고 정겹기도 한 집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이야기에 앞서 자신이 살아온 집들은 처음에는 물 근처였다가 지금은 산 근처라고, 친절한 정리도 잊지 않았다.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 집에 대해서는 아무 기억이 없다.
의사였던 아버지가 발령을 받아 춘천으로 이사 갔다. 세 살 때였다. 계단이 많은 언덕 위에 집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는 소파가 없었고 앞집에 소파가 있어서 거기서 많이 놀았다. 심지어 색도 기억난다. 카키색 바탕에 검은색 무늬. 옥수수를 많이 먹었던 기억도 난다.
공주를 잠시 거쳐 아버지가 세브란스에서 근무하시게 되어 서울로 왔다. 네 살 무렵이다. 연희동의 단독주택에서 살았는데 집 옆 공원에서 그네를 타고 놀다가 부딪혀 얼굴이 찢어지는 바람에 수술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여섯 살 무렵 다시 대구로 가서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았다.
그러다가 거창으로 가서 부모님은 거기서 정착하셨다. 아버지는 재작년에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아직 거창에 계신다. 거창에서 살던 집은 기억이 많이 난다.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면서 어머니에게는 가장 불편한 집이었다. 거창 적십자 병원의 사택이었는데 병원과 너무 가까워 응급실 소리,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릴 정도였다. 아버지에게도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 자체는 너무 좋았다. 원형이 살아있는 일본식 주택이었다. 마당에서 닭과 토끼도 키웠다. 큰 가족 욕실도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더니 그 집을 부수고 2층 양옥을 새로 그야말로 뚝딱 지었다. 그동안은 동네의 다른 이층 집에 가서 살았다. 새로 지어 들어간 집은 옥상에도 못 올라가고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고, 좋은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다가 병원을 증축하면서 다시 거창 강가의 2층집으로 갔는데 이 집에 살면서 입시를 치르고 거창을 떠나 서울로 가게 되었다.
대학 시절인 1990년대에 거창에도 아파트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은 4동으로 된 작은 단지형 아파트의 2층으로 이사 갔다. 아마 아버지가 처음으로 소유한 부동산이었을 것이다. 병원 가까운 곳에서 벗어나셨으니 아버지에게는 가장 편안한 집이기도 했을 것이다. 아직도 어머니는 그 집에 사신다. 이 아파트에는 물론 내 방이 없어서 가면 거실에서 자곤 했다. 거창은 거대한 분지인데 이 집이 높은 곳에 있어서 그야말로 '논 뷰'와 '밭 뷰'가 활짝 열려있었다.
여기까지가 서울에 와서 살기 이전의 집들이다. 세어보면 모두 합해서 10개의 집을 거쳤다.
19살에 서울로 왔다. 처음에는 대학 기숙사에 살았는데 공동생활이 불가능한 성격인 것을 알았다. 결국 학교 앞에 집을 얻었다. 옥탑 방이었는데 낭만 같은 것 없었고, 서울이 싫어서 목요일에 수업이 끝나면 바로 거창으로 내려가 주말을 보내다가 올라오곤 했다.
그러다가 남자 사촌이 군대를 가게 되었는데 고모가 1년만 데리고 살아 달라 하여 마포 서강대 인근 다세대 주택에서 1년 정도 살았다.
마포에서는 다시 이사를 갔는데 가든 호텔 옆 마포대교가 보이는 낡은 오피스텔의 복도 끝 방이었다. 나름 모던한 상황이었다.
다시 여동생이 올라와서 건대 근처 뚝섬으로 이사 갔다. 여행용 가방 하나 들고 올라온 서울 생활이었는데 이 무렵부터 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대학 3,4 학년을 보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가게 되었다. 학교가 경기도 남부에 있어서 통학을 위해 한강에서 가까운 잠원동으로 이사 갔다. 여기서 4년 정도 살았다.
동생이 양재동에 직장을 얻으면서 또 다른 물가로 이사를 갔다. 삼성역 대각선 방향의 대청역 근처였다. 양재천이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에 지은 아파트라 낮고 조용했다. 지금은 아마 훨씬 커졌을 것이다. 양재천의 다리를 건너면 대치동이었고 멀리 코엑스가 보였다.
물가로 이사 가는 행진이 계속되어 한강이 보이는 뚝섬의 작은 단지형 아파트로 이사 갔다.
여기서 또다시 옮겨간 곳은 안양천변의 목동. 역시 2-3개 동으로 구성된 작은 단지형 아파트였다.
이 대목에서 인생의 큰 결심을 했다. 새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이태리로 유학을 떠났다. 학교는 토리노에서 한 시간쯤 더 가는 시골인 아스티라는 곳의 커다란 성에 있었다. 학교에서 10분 정도 동네 길을 걸어 계단을 한참 내려가면 ('108 계단') 거기에 기숙사가 있었다.
과정을 마치고 실습을 하러 간 곳은 해발 800미터에 위치한 아오스타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언덕 위의 집이라 창을 열면 몽블랑이 저 멀리 보였다. 작은 부엌, 방 하나, 거실 하나로 단출했지만 적당했다. 마을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2, 3층 정도 높이에 해당하는 곳이 있던 집이었다. 계단을 돌아내려 골목으로 총총 걸어 출근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완전 시골이지만 유럽 사람들에게는 휴양도시다.
귀국을 했다. 일산의 오피스텔에 잠시 살았다. 그러다가 2009년 말에서 2010년 초 사이에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왔다. '부자 마을의 낡은 집'이다. 일부러 산 아래 조용한 동네를 찾아왔다. 소음을 싫어하는데 보통 조용한 동네는 불편하지 않나. 버스 정거장도 멀고 편의점도 없고. 하지만 그걸 감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 2년은 하우스 메이트가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다. 혼자 살기는 넓고 둘이 살기는 좁은 집이다. 생애 통산 23번째 집이다.
지금 이 집을 좋아한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으면 처음에 좀 고치고 들어올 걸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집이 아니어서 마음대로 꾸미거나 바꾸지 못해서 아쉽다. 그래도 좋아하는 동네에서 살고 일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하지만 여기서 얼마나 더 오래 살지는 모르겠다. 만약 뿌리내리겠다고 생각하면 이 동네에서 집을 찾아보겠다
그러고 보니 서울에 산지도 이제 30년이 넘었다. 거창에 가끔 가지만 고향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제 서울이 내 집이다.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내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오다가 한강을 건널 때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젊었을 때부터 오랜 시간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필요하면 이사를 다녔다. 내 소유의 집이 없었기 때문에 동네를 고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소유하면... 못 움직인다. 그래도 가끔 내가 정말 바라는 집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 집은 나만의 성(城)이에요. 마당에 꼭 필요한 것 같지는 않지만, 집 안에 있으면서 계절이 바뀌는 것이 보이는 언덕 위에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물보다 산이 더 좋습니다.
허인이 겪어온 집의 여정은 겉으로 보면 본인 스스로도 말했듯이 '물가에서 산기슭으로'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기할 정도로 일관성이 있는 패턴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 변화의 계기는 잠시 동안의 외국 생활 도중 몽블랑을 바라보면 살았던 경험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허인의 집 이야기를 들여다볼수록 소유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왔던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소유하면 움직일 수 없다'라는 말은 너나 할 것 없이 주거 문제로 고뇌하는 대한민국 사람의 입에서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집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우리 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우리의 삶을 부자연스럽게 하는 것일까. 소유하면 소유하는 대로, 소유하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집은 멍에고 족쇄다.
허인은 평균적인 한국인보다 훨씬 이사를 자주 다녔다.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서울을 모두 거쳤고 이 글에는 나오지 않지만 심지어 한 때 제주도와 서울을 왔다 갔다 한 적도 있다. 서울 안에서 살았던 곳들은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다. 대부분의 집에서 보낸 시간이 길지 않았고 강렬한 기억 같은 것도 없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온 곳이다. 이렇게 필요에 의해 여기저기 옮기며 살다가 때가 되면 자신의 선택에 의해 어딘가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것. 집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역설적으로 가장 집을 잘 이용하고 즐기는 것, 어쩌면 이것이 가장 당연한 집 이야기가 아닐까.
(*이 글을 쓰고 나서 브런치에 올리는데까지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익명으로 올리려고 했는데 본인이 굳이 그럴 필요 있겠냐고 했다. 그 사이 허인은 먼저 살던 곳보다 더 높은 산기슭으로 이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