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비 오늘은 바람

그때도 나는 그 생각에 매달렸다 46.

by 어떤 생각




오랜 사진첩을 들춰보다

색이 바랜 사진 위로 오버랩이 되는

미소를 만났다.


그날도 흐리고 바람이 불어 었지

늦은 가을로 막 넘어갈 무렵

이맘때였을 것이다.


우연히 마주친 외진 골목 담벼락에

너의 얼굴처럼 붉은 꽃으로 만개한 상사화

나도 덩달아 달아오르던 순진純眞


기억의 기립과 동시에

질긴 그림자처럼 떼어지지 않는 눈빛이

어둠 저 편에서 바람 한 줌으로 달려오는


아! 희미하지만 분명 숨어있는 내 안의 여자.


가을이 오면 끈질기고 집요한 그리움으로

내 가슴을 더 붉게 물들이는

그대 이름은 첫사랑.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미소이고

떼어내도 어느 사이에 달려와 자리를 펴는

그림자와 같은 기억이다.


이것을 피하는 방법은 사실 없다.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따라붙는 그림자가 그렇다면

이 또한 필연의 운명이라 말하고 싶다.


날이 흐리고 바람까지 불 때는

이 주홍색 그림자가 나를 저격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은신하며 나를 따라다닌다.


응달에서는 살아나고 양지에서는 은신하는

이 변화무쌍한 그림자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순수 순백 순진 그리고 분홍빛 미소

이런 기억들이 포장된 상태로 편도표를 들고 떠났기에

돌아올 수 없는 절박성.


그리움이 도착하길 염원하는 막연한 기대 위로

기다림의 층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화석처럼 굳어진 시간의 편린.


들리진 않아도 만질 수 있는 목소리처럼

기억이 아득할수록 색 고운 파스텔조의 여백을 갖고

내게 아름다움으로 부추긴다.


나이가 들어도 이런 사랑 앞에서는

흥분과 열정이 솟구친다.

왜냐하면 사랑은 나이가 아니라 감정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그림자가 희미할수록

그 열망의 그리움은 더욱 강한 흡인력을 갖고

내게 다가올 것을 기원하게 된다.


다만 가까울 수 없기에 마음의 갈증은 더 하고

그림자 쫓기에 간절함을 보여도

그 거리까지는 더 멀어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


첫사랑은 신기루요.

봄날, 스치는 바람에도 지는 허망한 낙화처럼

내게 일장춘몽으로 남아 있을지라도


한번 기억이라는 유리병 안에 들어가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고 그림자처럼 평생 따라다니는

영원한 숙명적인 존재가 된다.


더러는 가시에 찔려 피를 보기도 하지만

지난 시간이 그리워 늘 머무는 바람처럼

사랑의 끄나풀에 매어 있는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래전 스쳐 지났던 빛바랜 시간의 흔적조차도

가을비가 온 뒤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마술을 경험하는 건 아닐까?





첫사랑 210mmX135mm, Line Drawing on Paper(Croquis Book),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