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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류 Feb 09. 2022

영화<더 킹> 과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2부

1부에 이어서 - 




그들은 왜 2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나?  

   

하지만 이 영화는 2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 구체적인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네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너무 많은 인물의 등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영화에서는 주연급 혹은 못해도 주조연급에 해당하는 배우들이 모두 카메라에 잡히는데 이 인물들이 아무런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서사 구조가 존재하는 인물만 추려도 일곱 명이 넘어간다. 주인공인 한강식과 박태수만 조명하기에도 내용이 너무 많은데 주변 인물들이 끝없이 등장하다보니까 이 인물들의 전사를 제대로 할애할 물리적인 시간 여유가 없다. 


솔직히 영화의 초반을 볼 때에는 감독에 대한 큰 기대가 있었다. 단순하고 짧은 몇 장면만으로 박태수가 왜 날라리에서 검사가 되고 싶어 했는지, 어떻게 양아치가 검사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세련된 기법과 적은 대사로 잘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등장하는 인물들은 늘어 가는데, 인물의 비중은 거의 카메오 수준으로 전락해버렸다. 고아성 같은 인물은 정말 카메오 혹은 우정 출연쯤으로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그 외에도 정확한 서사가 필요한 인물이 일곱 명이 넘는다.                  




박태수 주변인물 - 박태수(조인성 분), 임상희(김아중 분), 박시연(정은채 분), 허기훈(박정민 분)

한강식 주변인물 - 한강식(정우성 분), 양동철(배성우 분)

김응수 주변인물 - 김응수(김의성 분), 최두일(류준열 분)

적대세력           - 안희연(깁소진 분), 오대환(송백호 분)




이정도의 많은 인물들이 단지 박태수와 한강식의 상황을 설명하거나, 활동에 대한 수단으로서 사용되고 버려진다. 훌륭한 배우가 다수 포진하고 있는데 이정도 섭외력은 한재림 감독 개인의 능력이라고 치더라도 이들에 대해서 모든 서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게 누구더라도 이정도로 많은 인물을 표현하기에는 134분짜리 영화는 너무 짧다는 것이 이 모든 인물들을 2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이유가 부적절한 점이다. 한강식이 적대 세력을 청산하는 방법을 두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이미 모아둔 자료를 이용해서 여론을 조작하거나 상대를 낙마시키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김응수를 이용해서 상대방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김응수의 등장이 매우 이상하다.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에서도 등장하는 들개파는 이번 영화에서도 등장하는데, 감독 개인의 취향이 들개를 좋아하는 것인지 혹은 특별히 영향을 받은 세력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개가 사람을 먹는다는 장면을 굳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넣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이건 그냥 자극적일 뿐이지 개라는 존재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만약에 조금 더 이해의 범주를 넓히고 은유를 억지로 찾아본다면 이전에 한강식의 개로 활동했던 사람들을 개를 이용해서 죽인다는 어떤 미묘한 관계를 이야기 해볼 수는 있겠지만 이건 정확한 은유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장면은 주인공 박태수에게서도 등장하는데, 이렇게 짧고 호흡이 바쁜 영화에서 박태수가 버림받은 이후에 하는 술을 먹다가 실려 가는 장면과 좌절해서 머무르는 장면은 너무 쓸데없이 길다.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박태수에게는 반격할 수 있는 자료가 한 트럭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냥 좌절해서 있었다는 것은 이 인물이 지금까지 보여 왔던 소위 말하는 깡다구와 경험치에 비해서는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 와중에 안희연이 찾아왔을 때 보인 옷을 벗는 듯 한 행동도 그냥 이유 없는 과장일 뿐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또라이 짓이라고 하기에는 어렵다. 


이런 행동은 양동철과 안희연도 마찬가지인데, 각각의 등장인물의 행동 양식은 너무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단어를 쓸 뿐이지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재미있는 부분은 양동철과 안희연은 사투리를 쓰는 것을 제외하고서는 쓰는 단어가 거의 비슷한데, 한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그냥 사투리를 쓰고 안 쓰고, 남녀의 구별이 있으며, 서로 돕는 편이 다르다는 정도 외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와 어투는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을 알 수 있는 상당히 중요한 기구인데, 이렇게 비슷한 단어를 쓰는 사람이 둘 정도 배치되어 있고 행동도 다각화를 이루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인물들도 2차원에서 결국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세 번째 이유는 감독이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애매모호한 메시지 때문이다. 앞서서 문학작품이 극단적인 상황과 인물을 사용하는 이유는 작가의 메시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짧은 지면 안에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기술한 바가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경우에는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확하지 않다. 


감독은 박태수를 중심으로 해서 현대사를 따라간다. 전두환 이후 시기부터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을 풍자하고 당시에 있었던 풍문들을 최대한 많이 집어넣고 싶었다. 그 와중에 성공에 목말라 있는 젊은 검사와 부패한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한강식과 그의 패거리 등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결국 피카레스크 물로 분류되는데 모든 악인들이 각자의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지만 결국 어그러지고 권선징악이 아닌 상황에 따라서 뒤집히면서 살아가는 현대사의 일면을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건이 너무 많았다. 이게 더 정제가 되려면 박태수든 한강식이든 인물 하나만 잡고 주변의 상황을 조금 더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다. 주인공이 두 명이 된다는 것은 전사가 두 배 이상이 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세력 군이 달라지는데, 이러한 상황만 정확하게 묘사하기에도 사실 134분은 짧다. 그 와중에 정치사의 실제 장면들을 끼워 넣어서 현실감까지 살리려고 했는데, 이 정치사적인 부분에 대해서 너무 많은 시간이 할애되다보니 오히려 주목해야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잘려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인물이 단면적여지고, 뒤로 갈수록 상황에 휘둘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인물이 시나리오 밖으로 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에 대해서 감독의 변을 조금 해보자면 아마도 감독은 여러 가지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그들의 중심에 있었던 검사라는 직군이 가지게 되는 입장들만 가지고도, 그러니까 검사가 가지는 상황들만 잘 배열해도 하나의 서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사건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유기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 사건 하나하나에도 전후사정이 있으며 그 속에 모든 인물을 끼워 넣기에는 억지가 너무 심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물에도, 사건에도 집중할 수 없는, 신문지 조각을 모아다 만든 스크랩북 같은 영화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이유는 상황에 잘 맞지 않는 결말 때문이다. 박태수는 정치인이 되는 선택을 한다. 이 정치인의 행보에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장인이다. 박태수가 처음 한강식으로부터 버림받아 지방으로 좌천되었을 때 월세 500에 대한 돈은 최두일로부터 나왔다. 그런데 최두일이 몰락한 이후에도 박태수는 계속 그 집에 머무르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디에서 돈이 나온 것일까? 심지어 전 재산이 압류 되었는데도 여의도에 사무실을 얻고, 수트를 맞추고, 차를 사서 와이프를 만나러 간다. 이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전 와이프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 데려간 곳이 맥도널드이다. 


이건 정말 웃기지도 않은 개그이다. 정치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뒤에 바람을 펴서 별거 중이었던 아내의 아버지가 정치 인맥을 만들어준다. 박태수는 한강식에게 단물이 다 빨리고 꼬리 자르기처럼 버림받았다. 부장도 달지 못했기 때문에 변호사를 해도 전관예우도 없을 이 사위에게 장인은 어째서 그렇게 큰 투자를 하게 된 것일까. 이 과정도 누락되어 있다. 그냥 장인이 도와주었고 와이프는 자신의 어필에 넘어왔다. 초반에 원래 날라리였고 노는 것을 좋아했기에 도서관보다 롤러장에서 공부가 잘 되었다는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던 감독의 서사에 비교해보자면 너무 형편없이 부족한 근거들이다. 


자 그럼 이제 한 발 더 나아가서 결론을 보자. 박태수는 자신의 고발에 신뢰를 얹고 싶었고, 정치인으로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강식을 제대로 끌어 내리기 위해서 종로구에 공천을 요청하고 선거에 나가서 거의 이길 것 같은 분위기까지 끌고 나간다. 이건 고등학교 1학년 까지는 최선을 다했지만 2년간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를 들어갔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이준석 같은 인물도 무관의 제왕에 지나지 않고 정치판을 10여년을 기웃거렸는데 초임이 종로? 이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일까. 심지어 한강식을 끌어내렸지만 다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히 밟은 것도 아니며, 자신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으면서 멋있는 척 웃는 조인성의 얼굴 뒤로 세상의 왕은 당신이라는 말도 안되는 나레이션으로 영화를 맺어버린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신나게 여러 상황을 열거하다가 마무리를 해야 하니까, 마치 우리는 모두 세상의 왕이고 그래서 뭐든지 바꿀 수 있다는 식으로 매듭을 지으면서 더 킹이라는 주제를 수미 상관으로 살리는 멋있는 선택을 했다는 건데, 이건 아쉽다 못해 처참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영화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캐릭터는 모든 이야기의 힘을 잃고 붕 떠버린다. 개연성이라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캐릭터는 개연성을 모으면서 힘을 얻고 그 개연성이 붕괴되는 순간 이야기가 통째로 사라져버린다. 이 개연성의 마무리를 짓는 것이 바로 결론이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건 납득할 수 있는 사건을 쌓고 그에 맞는 결론이 났을 때, 그 결론의 모양이 어떠하건 간에 감상에 울림을 줄 수 잇게 된다. 하지만 감독은 이 부분을 걷어차 버렸다. 결과적으로 모든 것은 조각이 되어버렸고, 이야기도 인물도 2차원에 갇힌 것이다.


           

 화려한 촬영 속 바스라진 서사의 끄트머리     


이 수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더 킹>은 비쥬얼적으로 훌륭한 영화라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배우의 면면도 그러하지만 특히 빛나는 부분은 촬영기법이다. 이 촬영 기법 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세 가지 정도 있다.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색을 활용하는 방법이다. 이 영화의 화면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의 색상으로 나뉘어져있다. 화면 전체를 한가지의 톤을 중심으로 잡고 진행이 되는데, 박태수가 어린 시절부터 검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블루 톤의 화면이 진행된다. 이후 부패하는 장면에서는 그린 톤이, 향락의 시기에는 골드 톤이, 낙마한 이후에는 화이트 톤이 그리고 김응수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면은 블랙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화면의 톤은 직관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관람객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별로 사용되는 톤도 재미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사법고시에 합격한 직후 조인성이 입은 화려한 코발트블루의 양복이다. 코발트블루는 예로부터 청금석에서 얻은 색상으로 원석에서 색을 바로 채취해야하는 희귀한 색이기에 지금도 가장 가격이 비싼 물감이다. 따라서 이 색상은 옛날에도 성모 마리아의 옷감, 예수그리스도의 옷자락 등을 표현하거나 그 보다 더 옛날로 가면 파라오의 옷감 혹은 화장에 사용되었을 정도이다. 이런 성공에 대한 색상을 성공한 박태수에게 입혀버린 것이다. 성공한다는 것을 청운의 꿈으로 부르고 있는 우리의 문화와도 어우러지면서 하늘로 날아가는 박태수의 마음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완벽한 색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소재를 적재적소로 사용하는 작가의 센스를 들 수 있다. 여러 소재가 있지만 유리잔의 활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내와 결혼하고 성공한 박태수는 유리잔으로 만든 피라미드 위에 술을 붓는다. 그리고 그가 몰락할 때 이 위태로운 피라미드는 다리부터 무너져 내린다. 유리, 윗 잔부터 채워나가면 아래로 뻗어나가면 채워지는 술과, 가장 아래의 유리잔의 가는 다리부터 깨어지는 모습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효과적으로 박태수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효과가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이유는 유리라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유리는 투명하고, 반짝거린다. 어떤 조형으로도 만들 수 있으며 특히 속이 완전히 비춰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름답다. 유리는 무척 강도가 약하지만, 생각보다 그 형질을 잘 유지하며 깨졌을 때 매우 날카로워서 흉기가 되기도 한다. 이런 모순적인 성질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형상 자체가 박태수와 주변 인물에 대한 은유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은 화면의 진행과 전화에 쓰이는 독특한 촬영기법들이다. 박태수가 롤러장에서 공부를 하거나, 달리면서 공부를 하는 장면은 박태수의 몸에 카메라를 붙여서 박태수를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게 보이게 하는 촬영기법이 있는데 이 부분이 정말 재미있었다. 달리는 박태수의 모습 전체를 촬영했다면 무게감이 없었겠지만 박태수의 머리에 모든 초점이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박태수의 감정에 조금 더 쉽게 이입할 수 있으며 그 주변 상황의 변화를 더욱 민감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박태수가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 고시원을 들어가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부감을 사용하고 마치 방에서 방으로 문을 열고 이동하여 넘어가는 촬영 방식도 무척 재미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위치에 따라서 사는 곳이 변화한다. “나”라는 인물은 그대로 있는데 내가 사는 “공간”만 변화하는 것이다. 이 “공간”을 이어나가면 곧 “나”의 일생을 그릴 수 있는데 이것을 매우 시각적으로 보여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화려하고 세련된 기법들과 엄청난 출연진 그리고 곳곳에서 빛나던 감독의 센스에 서사가 무너져버렸다. 만약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봤다면 조금 감상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빠른 전개, 장면 전환으로 인해서 이 단점들은 상당히 가려지고 희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화면, 이미 지나간 시간들은 단점들까지도 같은 비평의 선상에 서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이 단점들이 더욱 눈에 띄게 되어버렸다. 화려한 촬영 속에서 무너진 서사의 끄트머리, 조각난 스크랩북은 이 모든 서사를 2차원에 가둬버렸다. 그래서 보는 내내 재미있었지만, 뒷맛이 별로인 참 씁쓸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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