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o Oct 08. 2020

강에게

평가받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

회사에서 이메일링 구독 서비스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 대표의 뜻이었는데, 쓰고 보니 두 가지가 같은 걸까 싶다.

마감일에 맞춰 짧은 에세이 한 편을 써 내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자유롭게 써 보란다. 주제가 정해지지 않은 글을 쓰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쓸 게 없어요.’라는 말을 몇 차례 뱉으며 소득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리옹이 그리워졌고, 자연스레 그 시절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 글의 제목이 ‘강에게’다.




때로 사람이 아닌 사물에게 치부를 들킨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프랑스 교환학생 시절, 내가 살던 리옹의 기숙사와 학교 사이에는 큰 강이 하나 흘렀다. ‘손강’이다. 손강은 그 시절 내가 비밀로 하고 싶은 일들을 모두 지켜보았다.




일월의 손강은 황량했다. 강을 건널 때면 살이 아릴 정도로 차고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다가도 한 번씩 겨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변덕스러운 날씨는 처음이었다. 타지에서 맞는 첫 번째 일요일, 내리 친구들과 꼭 붙어 다니던 나는 처음으로 혼자 기숙사를 나섰다. 날씨가 좋아 강을 따라 걸어가 선데이 마켓을 구경했다는 친구 말을 들은 뒤였다.

손강을 따라 걷는 중에 한 남자가 다가왔다. “안녕.” 길에서 만난 이와도 서슴없이 인사를 나누는 곳인지라 자연스럽게 답했다. “안녕.” 남자는 나를 살피더니 물었다. “한국인이니?” 며칠 동안 중국어로 인사를 걸어오는 이들에게 진저리가 나던 터라 반색하며 질문했다. 다들 동양인을 보면 중국이나 일본인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한국을 떠올렸냐고. 그렇게 강변을 걸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나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고, 곧 피곤해졌다. 나는 이만 헤어지려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웬걸, 내가 가는 곳이 자기의 목적지란다. 마켓 구경은 글렀구나 싶어 기숙사로 되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에 그는 본색을 드러냈다. 처음엔 어깨를 감싸더니 이내 정도를 넘었다. 겨우 떼어낸 뒤 기숙사로 들어간 나는 곧장 친구 방으로 갔다. “좀 전에 손강에서 이상한 남자를 만났는데 말이야…….” 일어선 채 이야기를 털어놓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닫자마자 손으로 뺨을 닦으며 펑펑 울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는 엄마의 메시지에는 그렇다고 답할 뿐이었다. 한동안 창밖으로 강을 내다보며 그가 찾아오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새로운 생활에 적응했을 무렵,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강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인사했다. “안녕.” 그게 그녀가 구걸하는 방식이라는 걸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매번 서 있는 곳은 내가 학교를 가려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이었다. 나는 그녀를 지나칠 때마다 휴대 전화를 만지는 척 고개를 숙이거나 바쁘다는 듯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까? 그녀 역시 나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고백하건대 그녀를 외면한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한번 돈을 주면 더 큰 걸 바라지 않을까?’ ‘동양인 여자 유학생인 내가 저 사람을 도울 입장일까?’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그 마음이 진심인지 핑계인지 모르겠다. 다만 어떤 까닭으로든 누군가를 외면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손강을 끼고 생활한 한 학기가 끝났다.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이 되자 리옹은 보란 듯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냈다. 귀국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홀로 손강을 따라 걸으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괜히 이 다리 저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친구에게 영상 통화를 걸어 자랑하기도 했다. 우울했던 첫인상부터 자꾸 마음에 걸리는 여인, 마음처럼 되지 않는 언어 탓에 울면서 하교한 날, 술에 취해 별것 아닌 말에도 까르르 웃으며 귀가한 날…… 많은 순간이 스쳤다. ‘너는 다 봤겠구나. 나의 두려움과 좌절, 기쁨과 죄책감 모두 너는 알고 있겠구나.’




며칠 뒤 담당 마케터에게 피드백(설문 조사) 취합 엑셀 파일을 받았다.

별 기대 없이 열었다가 회사에선 울지 않으리라는(화장실은 예외임) 나름의 규칙을 깰 뻔했다.

독자들은 저마다의 감상과 경험담을 나눠 주었다. 각자의 손강, 비밀, 우울 같은 것들.

특히 이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손강은 당신을 비난하지 않았을 거예요. 잘 되길 빌어 주었을 거예요.




우울한 시국에 우울한 글을 읽으니 처진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모두 더없이 소중했다.


문창과 재(휴)학생 신분으로 5년, 잡지사 편집기자로 2년. 내 글은 줄곧 평가받아 왔다.

그에 맞춰 나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하려, 불필요한 문장을 걷어 내려, 비문을 쓰지 않으려 애썼다.

여전히 그것들이 글 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여기지만, 이제는 조금 더 가벼운 몸으로 글을 쓸 수 있을 듯하다.

내 글은 작품이 아닌 이야기일 뿐이니까.


이런저런 상념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를 오래오래 쓰고 싶다.

활자가 아닌 목소리로 다가갈 수 있다면.


헤어질 무렵의 손강. 몇 년째 노트북 배경화면으로 쓰고 있는 사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