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P사업에 따라 생산된 원예작물을 인근국가에 판매...봉사자와 전문가
무거운 짐을 지고 버스을 타다가 오른쪽 다리무릎에서 삑 소리가 났는데 너무나 아파서 걷지도 못했다. 좀 쉬다가 알바을 나갔는데 며칠 추운데 서서 일햇더니 몸이 더욱 안좋아지고 무릎에서 너무 아파서 움직일수가 없엇다. 그러더니 감기까지 들었다. 집 전화도 여동생이 해지을 했다고 해서 어머니가 다시 전화통화해서 살리게 해준다고 했는데 여동생은 큰소리다. 1월 7일 자로 해지 되었었다.
대전이슬람센터을 다녀오면서 여러가지 일을 겪고 있다. 대전만년동새로남교회에 가서 차도 한잔 마시고 왔다. 이맘에게는 대전 신탄진등의 공장에 20여년전에 빈들교회 목사와 차을 타고 다녀왔다고 이야기 했다. 이맘은 나도 신탄진공장지대에 다니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한글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다녀오고 나서 나는 많이 아팠다. 몸이 완쾌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러다 더 아팠다. 과일가게 알바을 햇었는데 과일이 외국에서 수입되는 것이 국내에서는 대전오정동과 노은동 농수산물시장에서 거래가 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근교의 국가에 감귤을 수출하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중국산감귤수입을 제한하고 한국산 감귤을 수입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산귤이 한국에 수입이 되는 것일까?
UNV로 부탄에서 있을때 보니 사과을 인근국가에 수출을 하는데 사과가 익어갈때
쯤 되면 방글라데시에서 검역담당자가 부탄을 방문해서 포장하는 것을 일일이 체크한다. 그나라의 남'쪽지역에서는 귤을 생산한다. 내가 부탄을 간지 며칠 안되었을때 나보고 남쪽지역 귤생산지에 출장을 같이 가자고 했었다가 철회되었다.방글라데시에사 사는 한인들도 부탄귤을 먹어 보았을 것이다. 상당히 표면이 깨끗하고 귤도 맛있다.
내가 알기로는 제도산 귤은 검역도 검역이지만 일일이 선별해서 포장을 한다. 대전 태평동 동네에서 파는 귤도 상당히 표면이 깨긌하고 맛도 좋다. 내가 알바을 했던 가게의 귤은 귤껍데기기 헐겁 다..비료나 영양분 결핍이 아닌가 싶다. 육종적으로 그럴수도 있고.가격도 저렴하다. 저렴한 가격에 사람들이 사갔다.
사과는 가격이 쌌는데 맛을 보여주니 사람들이 사가기 시작했다. 남미산 에콰도르 바나나도 처음에는 안사다가 맛을 보여주니 사기 시작했다. 6~7송이에 2000원, 그다음날 스타벅스에 가서 보니 에콰도르 바나나 한송이에 1500원을 받고 있었다.
FAO에 제안을 했다. FAO와 UNDP에 과일. 채소. 임산물 생산판매 센타을 만들자고 .그러면 포장과 냉장냉동산업도 발전을 하고 각국봉사자와 전문가가 투입이 되어 원예작물등의 생산과 수확후과정을 함꼐 일해서 각국의 FAO 등에서 도시지역에 외국산 농산물을 판매하면 도시민들은 싸게 외국산 농산물을 먹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내가 판 과일을 주로 산 분들은 아파트 촌의 노인분들이 셨다. 30여년전에도 강남의 아파트촌에서도 영세민혜택을 받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다. 노인분들의 영양상태와 아이들에게 과자대신 사과 하나 바나나 하나 등 그들을 위한 복지 차원에서도 외국산 농산물 가게가 도시민의 아파트 상가에 들어섰으면 한다. 우리 농민들의 농산물도 외국에 수출하면서 말이다.검역이 문제라면 검역관을 수확시기에 맞춰서 그 나라에 파견하면서 농산물무역에 거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전은 지금 여기 저기에 아파트 공사가 진행중이다 .외국인 유학생도 늘고 초등학생때부터 외국으로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열대 과일도 접한다.먹으러 외국까지 관광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잘사는 동네의 어르신들도 한때는 외국관광을 다녀오신 분들이다. 아이들에게도 보다 영양가가 있는 농산물을 먹일 수있지 않을까 싶다.
high value, low price
그러나 식량 자원의 무기화을 생각하면서 국제기구에서 판매을 하면 공정무역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비롯 대전 태평동에서 작은 도서관에서는 거절을 당했지만 말이다. 대전에 17년전에 몇군대 하던 작은 도서관이 지금은 200여개가 넘었다는 말에 .....커피도 이제는 천원씩에 팔기에 공정무역을 제안했는데.예전에는 믹스커피가 무료라 힘들때 애기을 데리고 도서관에 가서 차도 마시고 애에게 책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서 글짓기 교실을 이년동안 다니고 일일찻집에 어린이 학예대회에서 시을 낭송하기 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