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소요로 방글라데시사람들이 반목할 것을 알면서 선뜻 도울수가 없는 이유는 그들을 풍족하게 도울 종교단체가 있기에
.난 KOICA나 kova나 선교단체의 진흙탕 싸움에 관심이 없습니다.자금이 없는 내가 나서서 일하는 것보다 자금력이 되는 교회에서 외국인근로자나 유학생들을 돕는다면 더 풍족하지 않을까요?
내가 자금 동원력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과 대적할수 있겠습니까?단지 안타까운것은 서로 이권싸움으로 다치지마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헤하려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 가진 사람이 둘을 가질려고 싸움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떠나면 돌아오면 환송식도 있고 해야 서로 상부상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그ㅓㄹ네 오랜 세월 뒤에 생각을 해보니 누군가가 서로을 이간질 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을 떠날때 충남대 소리하나 선배님들이 모이,셧습니다.서울 종로의 페밀리레스토랑에서요.2기선배중에 한 분은 정헌봉이라고 그 선배님은 한국청년해외봉사단 첫해1990년도 지원해서 시험에 1차 합격후에 저을 만나서 이상한 말을 했었는데 나중에 저의 소리하나 선배님과 결혼을 하셧습니다.그때 선배님은 그 선배님이 서울에서 가구점에서 일을 하면서 돈을 천만원인가 모아서 너무 건실하다고 했습니다. 그선배는 농대 학생회 여학생회장이었던가 학생회 임원을 했었던 관계로 부탁을 받아 1987년인가 재가 충남대 농대 축제에서 시낭송을 한적도 있고 축제에서 이태리 칸소네을 부른적도 있습니다. 수의대 기타치는 분과 같이 무대에 설려고 했는데 그분의 기타치는 코드와 저의 목소리와 맞지 않아서 저 혼자 무대에 서서 칸소네 라스파뇨라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소리하나 회장이엇던 김은자언니 결혼식에도 가고 2기선배님이 서울식품개발원에 대학원 졸업하고 올라와서 연락도 하고 했는데 방글라데시 다녀오니 연락이 잘 안되었어요.그리고 누군가가 2기 선배가 결혼한다고 이야기 해주었는데 서울로 올라가서 내려오기도 뭐해서 참석을 못하고 말입니다.아 소리하나 동기가 롯데리아 삼부프라자에 메니저로 있었네요.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을 나갓을때 같은 과에 전선영에게 소리하나 연락처을 부탁했는데 그때 언제인가 여동생이 농대 축산학과 인데 소리하나에 가입을 햇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나는 한국청년해외봉사단 다녀온 후에 소리하나 선배님들과 환송식을 못받았습니다.다만 UNV추천서을 받기 위해 충남대을 방문해서 미국유학을 다녀온 선배로부터 왜 실험실 선배들과 연락을 안하고 살았냐고 꾸중을 들었습니다. 만약에 연락이 되었다면 미국대학에서 연구과정을 통해 대학원을 들어갈 수있다고 이야기 해주었는데 그때 동기들을 못만났습니다.대학교수님인 과수분야에 교수님에게 UNV추천서을 부탁하자 그분은 충남대 선배로 국비유학을 미국으로 다녀와 교수가 된지 얼마 안된 황교수에게 넘겼고 화훼에 이종석교수님이 해주셧는지 육종학 파트였떤 김영래교수님이 해주셧는지 기억이 흐릿합니다.그때 노교수님이 강사로 학교에 오셧다가 하얀 와이셔트을 걷고 앉으셧는데 환하게 웃으셨던 것 같습니다.다른 교수님들은 다 서울대 출신입니다. 충남대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온 분인 부교수자리을 놓고 서울대나오신 분과 경합이 붙었는데 충남대 동문회에서 나서서 황교수님을 밀고 나왔다고 합니다.교수님들도 연구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분도 꼐시고 대학의 공직에서 더 열심인 분도 있다고 실험실 선배님들은 많은 이야기을 합니다
소리하나의식품가공학과 선배님은 대학원에 있을때 중국과 외교협정으로 충남대에 연변에서 학생들이 유학을 왔다는 이야기을 했던 적이 잇습니다..
이제와 뒤돌아보니 개인적으로 방글라데시에 같이 갔던 충남대 동문의 낙농학과 류덕호가 향명회였다는 이야기을 나중에 몇년전에 인가 들은 것 같습니다.어떠한 이야기을 햇는지 모르겟습니다, 코바 4기들이 모였을때 이야기 하더라구요.,자기는 동문들 모임도 간다고 말입니다. 저는 원예학과 애들이 상업농경영에 글을 쓰자 농업기술원에 잇던 동기가 집으로 연락을 해서 원혜학과 86학번 모임에 갔습니다.. 그리고 여학생 모임에 가니 애기가 돐이라 서울의 어느 아파트에서 모였는데 어느 친구는 그 자리에서 아이들 육아 도서 출판인쇔불도 돌리고 하고 나중에 는 대전에서 모였는데 첫딸을 낳은 애들이 많아서 아들을 낳는 비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시댁, 남편의 나이과 관련해서 아내을 대하는 태도을 이야기 하곤 했는데 ..저보고 원예학과 모임에 나올려면 2년회비는 다 안내도 십만원을 내라고 했는데 그때 집안에 다 털러서 금방 내지을 못햇습니다.
대학에서는 주로 대학4학년이 되면 여학생들이 모임을 합니다. 대학졸업사진도 찍고 여학생들은 결혼 대비해서 회비을 걷어 적립을 하며 결혼계을 듭니다 ,모임을 하면서 회비을 걷기도 하고 졸업후에는 결혼하는 친구앞으로 부주을 하기도 합니다.나는 한국해외청년봉사단을 나가기전까지 원예학과 결혼식이나 소리하나 써클 선배님 결혼식에도 참석을 했습니다.회비나 부주도 하고.
그리고 원예학과 86학번모임은 제가 만든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과 언니중에 한옥화라고 그 언니와 함께요. 학생회여회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호수돈 중학교 동창과 대학4학년때 모임을 해서 돈을 걷기 시작했는데 내 친구 여동생이 새마을금고에 다닌다고 그 곳에 통장을 가져와 그곳에 넣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무슨일인가 내 친구는 충남대 사학과을 더녔는데 친구가 자기 아버지가 근무한다는 곳에 대전근교에 임업연구윈인가을 한 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내가 방글라데시에 갓을떄 결혼사진도 보내와 내가 방글라데시에서 아롱이라는 수공예점에서 커다란 가죽귀중품함을 보냈습니다.그때 봉사단 동기들도 한국으로 수공예품을 사서 보내고 있엇거든요.여자들이라 장신구도 관심이 많앗던것 같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네팔에서 봉사활동햇던 1기 이문화코디가 아파서 중도 귀국을 해서 제가 국장이기라서보다는 아무튼 동기들을 챙기고 중간평가회도 하며 다카관광청을 컨텍해 가이드와 봉고차을 예약해 다카 관광도 잘 마쳣습니다. 그때 저의 동기들이 모엿을때 저의 동기 하나가 저보고 코디네이터을 하라고 해서 제가 영어가 좀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가 도와준다고 했지만 거절햇습니다.그리고 나중에 5기 파견을 앞두고 11기 스리랑카에 권준희 선배가 오셔서 그 분의 일도 도와드렷습니다. 봉사단 모임이나 회식도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타의 전화로 봉사단 근무처에 전화을 걸거나 세명의 동기들이 살고 있던 아파트에 릭샤을 타고 가서 알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안데 제가 속한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타에서 제가 전화거는 것을 싫어하기도 했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전화세가 비싼 편이고 가정마다 전화가 있은 집도 드물어요.전화가 필요하니 도로에는 텔레폰도깐이라고 전화가게가 있어서 3분인가 1분 전화시간을 체크해서 돈을 현금으로 냅니다. 저는 이 텔레폰 도깐에서 집전화 042-533-9362로 전화을 많이 햇습니다..저희 부모님은 제가 살던 이퀴발 로드의 로드리고 집에 1층 집주인집 전화로 전화을 하고요.PNG에 갓다는 어느 단원은 집중딘전화로 전화을 하고요.집전화가 고장이 나서 한번 해봤다고 합니다.집주인이 카톨릭이라 현지인들이 안좋아 햇는데 그집은 빙글라데시 동남부치타콩가까이의 힐트랙에 사는 자끄마 라고 농업성에 푸드윙에 국장인 후셀대완이 살았어요.그뷴들은 불교교요.
그런데 저는 5기들에게도 한다고 하고 6기들이 도착할때도 KOICA부소장을 도와 현지교욱을 도왔습니다. 어떻게 할 것인지 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요.
한데 권준희 선배가 5기 도착하기전에 호스텔을 제세팅시키고 정리하고 5기 현지훈련을 게획도 돕고 했는데 나중에 은근히 왕따을 시켰어요.LETS play with sport game을 준비할 때는 류덕호와 같이 서 쪽발이 들이라고 이야기 하고 몇명안되는 인원들이 격려보다는 참석하네 마네 말이 많앗어요.그들은 실렛으로 여행을 가는데 저는 이 스포츠게임을 준비하려면 갈 수가 없엇구요.그런데 회의에 참석해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JOCV여자대표와 이런 저런 이야기을햇어요,그녀도 브리티쉬카운실에서 영어을 6단계하고 있었고 자신은 일본협력대계약이 종료하면 조경인가을 배우기 위해 호주로 유학을 갈 것이라고 말입니다.그리고 jocv는 80여명이 되는 참석하지 않겟따고 한 사람도 있지만 자신은 JICA에서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는 비교가 되었지요.그리고 가죽가방을 들고 하얀와이셔츠에 바지을 단정히 입고 나타났던 영국VSO대표는 한다는 말이 사람들이 너무나 자유로워서 몇명이 참 석할지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그때 방글라데시 우먼컴프렉스에서 열리던 봉사단 운동회는 일본협렫대가 20여명 정도, 한국청년해외봉사단은 6명인가 참석하고 영국봉사단은 제시간에 안나타나고 좀 늦게 자유로이 입장을 햇습니다. 그리고 그날 VSO가 참석한다고 했는데 CONCERN 에서도 왓습니다. 그 남자분은 아일랜드 사람이라고 햇고 우리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여러가지을 능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 했습니다.운동장 땅바닥에 앉아서 말입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과는 대화을 많이 못햇습니다. 참 수줍어하며 일본인애가 농기꼐라고 자기을 소개 한적이 잇고 말입니다. 나중에 느닷없이 권준희 선배가 운동회 끝날무렵에 봉고차을 가지고 와서 가자고 했어요.그래서 다른 봉사단과 운동회을 끝나고 마루리을 못하고 통성명도 못하고 헤어졌어요.권준희 선배는 KOICA 에 이야기 하니 뒤늦게 허락이 나서 봉고차을 가져왓다고 하고요.그리고 뒷풀이을 헤야 햇는데 못하고 그 대회을 준배한 JOCV와 연락을 못햇어요.,우리가 너무나 어려서 일만 했지 평가을 못했네요.
세월이 흘러서 코바 후배을 만나서 스포츠 게임이 진행되느냐 물으니 자기네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글라데시 글자도 배우지 않고 있었구요.
나중에 한국해외봉사단 6기가 와서 부소장과 일을 하면서 후배들 임지을 동행해달라고 해서 가게 되었습니다.일본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 같습니다. 지방에 있던 JOCV또다른 곤도가 6기 지역사회개발로 온 임업분야 오선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그녀는 방글라데시 시골그람에서 미싱4대을 사서 시골아낙네들에게 미싱교육을 해서 수공예품을 만들어 선별해 판매점을 여는 프로젝트을 햇다고 합니다.방글라데시에서 수공예품교육을 한 JOCV가 있었는데 탕가일 시골여자들이 천에 수놓은 가방을 저에게 판매해서 사준곤 했었는데 JOCV는 수공예품교욱을 하고 작품을 만들어 판매까지 연결하더라구요.그리고 오선경을 데리고 일본 jocv지역개발 사업이 진행되는 꾸밀라에 동반해 가니 사업단장이 주연도 베풀고 식사도하고 그다음날 지역교육센타와 농산물 판매센타와 농기계 창고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모르는 뱅갈리시골 사람들에게 일본 협력대봉사단이 뱅갈리을 가르치고 천연염색등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꾸밀라 지역개발 계획서을 영어로 된 것을 JOCV2기ㅇ니 사업 단장이 저에게 주어서 나는 6기에 지역개발 분야로 온 6기에 하경희와 6기에 오선경에게 한부씩 똑깥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들어오니 하경희씨가 남자친구와 일본과 의류판매 일을 한다고 하고 오선경씨는 리비아대사관에 7기 박정선씨와 같이 근무했다고 합니다. 오선경씨는 리비아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인천에서 나에게 전화을 하면서 이야기 햇는데 제가 서울까지 갈 여력이 안되었습니다. 임업엔지오에서 일한다고 했는데 ....
부산에서 내려가서 잠깐 살때 박정선씨을 만났는데 애 아빠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을 하더라구요.그리고 오선경씨는 나중에 연락을 햇는데 딴 청을 떨고 모르는체 하고요..
그리고 나중에 5기들 오고나서 나야 동기들 활동에 관심을 덜 쏟고 내일을 앴었는데 현지교육을 위해 도착한 6기들도 눈치을 챗는지 대표는 언니인데 하며하더라구요.미라 언니가 어른 노릇을 하는 것은 맞으니 아무말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아파트에 세명이 사니 무슨 말을 하든....가꿈식 둘이 편먹으며 가서 다른 한사람에게 이야기 해주는 정도로....그리고 다른 동기는 5기 대표격이 이현주라고 기독교라서 부탁을 하고 ..나는 가까이에 사는 김영주라고 후배 챙기고 새로온 코디네이터인 권준희선배가 류덕호을 챙기게 신경써쥬고....모이라고 하면 연락해주고...
KOICA지역사무소가 설립이 되고 봉사단 6기가 오고 권준희 선배가 한국으로 돌아가 KOICA직원으로 채용된다는 소식에 모두들 잘 됐다고 햇다. 한데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KOICA에 가서 악수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직원채용이 철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중에 만났던가 기억이 까물한데 일때문에 충남대에 가서 농대도 가보았다고 이야기을 했었다.
나는 봉사단을 다녀온 후에 한국해외봉사단원들과 안만날 생각이 었는데 여기저기서 해외에 다녀온 동기들이 전화가 오고 만나자고 하고 햇다.그리고 코이카에 코바 모임에 갔다가 깜짝 놀란 것은 코바3기 어느 선배가 그러는 것이다. 내가 우락부락하게 생겻다고 생각을 햇다는 것이다. 아니 내가 어떤 행동을 하고 방글라데시 동기들이 어떤 말을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이상하게 선배들사이에 회자가 되었는지 ..한데 코바 임원진을 구성하고 부천에서 외국인근로자 문화제을 하는데 3기들이 대거 참석을 햇다. 너무감사하고 김미행 네팔선배에게도 감사한다. 연락을 잘 해주엇고 3기선배님들에게 감사하다.그리고 동기중에는 방글라데시 4기 박미라언니가 참석을 해서 깜작 놀랫다. 평소에 한국에 돌아가면 동기들도 안보고 모임에도 안나간다고 했엇다. 그런데 내가 지방에서 있다가 서울에 가서 모임에; 가면 항상 참석하고 장례식이나 결혼식에도 참석한다.
그런데 서울에 가면 다른 동기중에 하나가 몽골다녀온 안효덕씨가 안좋은 이야기기을 했다.서울에 있는 봉사단 동기들이 자주 모이면서 무슨이야기을 하기에 나을 씹는 것인지....코바에서도후배들과 동기들도 무슨이야기을 해서 나에게 냉담한 것인지..이유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부탄 UNV을 나가기 전에 이병연과 최필곤과 나섬지와 채육대회을 열심히 준비하고 선배들이 격려해주고 윤장용 선배님은 부회장으로 잘 못하지만 트럭을 타고 와서 냉면을 사주고 가고 내가 UNV 롸 나간다고 하자 부탄가지 말고 자기가 하는 사업을 도와달라고 했었다.,그리고 선배님들이 잘 챙겨주셧다.특히 2기 태국강경희언니와 3기 김미행언니가 잘 챙겨주며 자꾸만 KOICA와 얘기해서 책을 쓰라고 권유했는데 개인적으로 한국청년해외봉사단 4기 파견국가 9개국의 여행정보와 여행언어책자을 만드느라 바뻤다. 집필진을 만들고 개인별로 만나느라 ..그리고 협조을 구하느라, 필리핀 단원들고 파견전에는 친했는데 줃간에 연락이 다끊기고 김건도만 연락을 했다.나중에 남명원이 들어왔다고 해서 만나서 조계사 산중다원에서 차 한잔을 하며 이야기 하니 이런 뜻깊은 일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한국청년해외봉사단 4기 모임을 서울 종로구 YMCA 회관 지하 1층 첼로에서 햇는데 많은 동기들이 참석하고 내가 그때 여행정보와 외국어 책을 낸다고 하자 반기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세을 살던 상왕십리 근처에 태국에 4기 황국희가 산다는 이야기을 듣고 그 곳에 커피숍인 장미빛 인생인가 에서 만나서 이야기 하고 흔쾌히 승낙하고 원고을 가장 성실히 완성해서 건네주었다. 간간히 만나고 덕수궁석조전에서 만나서 서울심포니 오케;스트라 야외 음악감상도 햇었다.
그전에 몽골에 다녀온 정은영아 먼저 전화해서 연결이 되어 서울에서 만나서 서울 예술의 전당에 음악회을 갈려고 했는데 정은영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늦게 나타나서 그 음악회는 못갔다. 나는 지역지 시절에 음악보도자료을 쓰기는 했어도 너무 바빠서 한가하게 음악회쫒아 다닐 시간이 없엇다. 보도자료가 오는데 음악회 티켓이 두장 온다. 그러면 나는 왕십리에 이모가 살아서 이종언니나 여동생, 동료기자등에게 음악티켓을 주곤 했다.
그리고 낮에 배우 인터뷰을 가거나 하면서 잠시 연극을 보거나 배우연기자을 기다리면서 그배우가 무대에서 연기하는 것을 느끼며 인터뷰을 하는데 그분들의 무대뒤헤서 된장찌게을 먹으며 인터뷰하는 사람도 있었다.
코바동기들은 음악이나 연극이나 별 관심이 없는것 같았다. 방그라데시에서도 세라톤 호텔에서 열리는 재즈연주회에 가자고 하니까 최정실 한명만 같이 갔었고 나중에 클린턴 대통령이 방그라데시을 방문하면서 그때 독일문화원에서 미국대통령 방문기념 피아노연주회을 미국대사관의 영사과에서 아는 분이 보내와 가까이에 사는 김영주을 데리고 갔었다.그분은 미국평화봉사단으로 강원도인가 어디에서 활동하셨던 미국인과 결혼해서 방글라데시 농업성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한국인 아내분은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영주을 챙겨주고 싶 은것은 아사드게이트 원예샌타에 노아칼리 지역에 국회의원이라는 분이 그 지역에 엔지오을 운영을 한다고 했는데 그 지역을 같이 가주어 너무 고마웠다. 내가 그럼 봉사단 한명을 같이 가겟다고 햇더니 그날 여행에는 그 분이 부인을 대동해서 자동차을 타고 같다. 그리고 그 부인은 농장을 둘러본 이후에 나보고 그 연못에서 목욕을 하자고 권했는데 그때 목욕은 못햇다.가만히 세월이 흘러서 생각해보니 목욕을 그 부인과 할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연못이 녹조류가 긴 것이지 더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나라도 내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을 왔는데 여름이라 애들이 나보고 수영을 가자고 권했다. 안양동으로 갓는데 유등천일 것으로 생각이 된다. 완전히 흑ㄹ탕물에서 놀아서 바라보다가 나도 들어가 놀았다. 애들과 ..그런데 누구와 갓는지 기억은 없다.
아파트에 사는 동기들은 내가 아사드게이트 원예샌타에 말릭들 우리나라로 하면 일용직이다. 그들의 대나무집이나 센타근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초청해서 그들의 시골집이나 다카의 집이나 굴산 시장의 장사하는 채소을 재배하는 시골의 밭등의 집을 다녀온 이야기을 하면 무식하면 용감하다,,천박하다 고 이야기을 했었다. 그리고 아사드게이트 원예센타에서는 내가 월드뱅크, 퇴직공무원뿐만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나을 초청하며 가라고 했다. 한데 방글라데시 농업연수원에서 방글라데시 농업공무원들과 FAO교욱애서 좋은 성과을 내고 출장비 받은 것으로 미스티을 샀는데 그이후인가 방글라데시 최고 명문대 다카 부총장이 와서 UNDP에서 나온 책을 주고 갔다. 그리고이어서 AIT방글라데시 농업 학교에서 강의을 해 달라는 강의 요청이 들어 왓다. 그런데 내 소속기관에서 아사드게이트원에센타에만 잇엇달라고 했었다.
방글라데시 일군들은 얼굴이 좀 브라운 깨통에 수염까지 길러서 처음에는 좀 그렇다.사디 농업연수원에 강사들은 말끔하다. 그리고 방글라데시가 인민사회주의국가지만 와이셔츠을 입은 사무직공무원등은 날씨가 꿉꿉해서 인지 와이셔츠을 반듯이 깔끔하게 차려입고 일반인들도 깍듯하게 예의을 갖춘다. 그들은 문화인이다. 햇빛이 강하니 멤부등으로 엮어서 무대 위에 넓게 세우서 그늘을 바르고 정치적 모임이든 다른 문화행사을 한다. 그리고 한국과 같이 어른을 존경하고 여자들을 무시하는 풍조도 있지만 여자 공무원들을 참 위한다.여자들은 혼자사 나가지 않고 남자가 밖을 나갈때는 같이 나가야 한다고 한다. 옆집에 짜끄마 며느리와 이야기 하다가 그 여자와 함께 소나르강 호텔에 가서 커피을 마시고 오는데 참 좋아 햇던 기억이 난다. 내가 아플때 문을 노크하고 세마이라는 우유에 국수을 넣은 음식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기바라는 여자가. 10대에 결혼해서 애가 4살인가 했다.
나는 지방에 출장을 다녀오면서 지방특산품을 사가지고 와서 그 옆집에 주기도 하고 집주인이 카톨릭이라 맥주을 사달라고 하면 내 면세점 카드로 사주기도 했다. 그당시에 면세점은 국가에서 허락을 하는 시스템이라 외국인도 그허가증이 없으면 면세점을 이욕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면세점 카드가 없어져서 다시 만들까 하다가 못만들었던 것 같다. 코디네이터가 뭐가고 했던가.
나는 탕가일에 곤도가 내가 일하던 아사드게이트원예신타에 찾아오고 곤도가 일본 JOCV들을 데리고 내가 사는 집에 오고 싶다고 해서 한국 봉사단 동기와 후배단원들을 내가 사는 이쿠발 로드 주택가에 집을 와서 모임을 하고 갓다. 못하는 음식이지만 준비을 하고 곤도도 사라다을 만들어 온 저도 있고 남자 단원들이 옃명 오곤했다. 아마 JOCV호스텔이 지루햇었는지...그리괴옆집에는 JOCV간호사 유 카리가 살았는데 남자 친구가 왔다 갔다 해고 내왕은 별로 못했다..
면세점 카드가 필요햇었는데 나중에는 간단하게 했다. 주로 최정실과 이현주와 김영주,고은주가 왔다.
모티질 아파트에서는 박미라와 김현정과 최정실이 살았는데 그 아파트에 일본이 JICA 전문가가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딱 한번 엘리베이터에서 봤다. 그 전문가와 아파트에 사는 동기들은 잘 어율인것으로 안다.
한데 세월이 흘러서 지지난해 2024년에 가을에 최정실연락이 갑자기 왔다. 제주도에서 그 부인이 왔는데 하면서 그리고 그전에 나보고 방글라데시을 25년도 1월에같이 가자고 했다. 그 부인을 전주에서 보고 헤어졌다. 난 기억에 없지만 주부라서 그런지 말은 통했고 오래간만에 영어을 해서 좀 그랬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중국인이라고 말햇던 죄정실이 우리나라 순대귝에 대해서 그 일본인 부인에게 설명하는데 달리 이야기 해서 놀랬다.
그리고 김미행씨기 느닷없이 세월이 흘러서 전화을 하며 내 주민번호을 물어서 가르쳐 주었는데 연락이 안된다.
2000년초에 코바 해외봉사단의 밤으로 12월 모임을 갔는데 코바 선후배가 돈을 얼마씩 걷어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다.코이카을 상대로 봉사단 필요물품인가? 코바 선배와 후배 들이 ...
내에게는 의사타진도 없엇다. 나는 가진것도 없다. 그러다 아마 코이카와 의견이 안맞은 것인지 선후배 기수들이 이권다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외교부에서 UNV모임과 코바 본부에서 충청지역의 코바 전화번호300명 정보로 충청코바모임을 준비중이었고 한국관광공사에 대전클럽을 만들어 대전을 알리고자 했었고 대화동에 한 교회에서 한국어을 외국인에게 서바이벌로 가르치려 했었는데 그때 그 교회에 삼성인가 앨지에서 다닌다는 여자가 한명이 왔다갔고 윤전도사라고 젊은 20대 후반인가 전도사에게 서울 라파엘 크리닉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외국인무료진료샌타가 대전에 필요하다고 했다. 나중에 윤전도사가 사라지고 어떤 젊은 목사가 목척교옆에대우당 약국에 2층에 외국인뮤료진료서을 개원하고 개원식을 크게 했다.나는 애아빠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 한국해외봉사단은 1년에 한번 총회을 열고 회장을 선임했었는데 그쯤에서 이사장 체꼐로 바뀌고 인도네시아 파견다녀온 목사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부산에 사상구에 애아빠와 같이 있는데 코바 사무국장이었던 4기 이선무가 전화가 왔다.국회의사당에서 세미니가 열리니 올라와주엇으면 좋겟다고, 원래 선배들이 총회가 끝나고 사무국장을 해달라고 했는데 집안 사정으로 거절햇다.
이세미나 바로 옆에서는 한일의원세미나가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무슨일인지 김미행선배가 나을 무시하고 모른채 했었다..
그러더니 방그라데시 정치적소요사태이후에 2024년 10월인가 11월에 전화로 연락해와서 주민번호을 가르쳐주었는데 전화을 안받는다. 사업을 네팔과 했다면 컨케이너가 우리나라에서 출발해서 방글라데시 치타콩이라는 초코그람에서 내려서 고속도로을 타고 방글라데시 북부을 경유해 네팔로 간다. 다른 경로는 인도의 캘커타을 통해서 비하르라는 철도 강도가 있는 곳의 고속도로을 지나서 네팔로 가야 한다. 김미행 언니의 남편은 농협에 다녔던 것으로 아는데 퇴직했는지 잘 모르겟따.치카콩에 다국적기업의 항만 프로젝트와 기업무역단지가 서는데 아마 어쩌면 방그라데시는 분단이 될지도 모른다.
자끄마의 피난민들이 인도아샘지역에 많이 살고 로힝야와 힘을 합칠지는 모른다. 로힝야는 미얀마와 안좋은 관계이고 ....두바이은행인가 에서 방글라데시 무역관련세마나을 다카와 치카콩 에서 같은 주제로 열었다.
그리고 방글라데시는 다카에 은행은 다카에서 지역은 지역은행에서 돈을 쓴다.
그래서 슬프다,나는 딸아기가 국제 기구에 관심을 갖어 글을 썼따. 신문이나 책에 의한 사회단체에 가입해서 생긴 환경문제가 아니다.
딸이 어려서 주택가에 사는 나는 집안일도 하고 알바도 하고 돈이 별로 없었다,그래서 유평초등학교에 가서 나뭇잎을 따서 책도 만들고 벌레도 보고 놀고 애가 아프다고 하면 유등천변을 걷게 하고 아이는 커서 유등천에서 같은 학교남자 애와 김아연이라는 애와 같이 다슬기도 잡고 자전거도 타고 즐겁게 돌아다니게 했다. 난 딸을 집에서 혼내키기도 햇지만 유등천변을 걸으며 아무말도 안하기도 한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은 길고양이에게 참치캔을 사주기고 한다. 어느날은 길고양이을 병원에 데려간다고 해서 그 아이들과 길고양이을 데리고 세이백화점앞에 동물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그고양이는 제자리에 가져다 주었고 나중에 중1때는 느닷없이 초등학교 동창과 같이 검정고양이을 집으로 가져왓다. 다른 친구가 나중에 가져간다고 하고. 한데 고양이는 누가 기르던것인지 도망도 안가고 딸이 고양이 보채도 자기 방에서 키웠다. 공부을 해야 하는데 웬고양이 ?
그리고 영수을 나와 같이 공부하는 조건으로 고양이을 키웠다. 나 중에는 고양이가 창문으로 들어왓다고 한다. 작은 고양이가 ..병원에 데려가고 한달만 산다고했는데 지금까지 산다. 고양이을 기르더니 동물학대하는 사람은 나쁜사람이고 그러면서 환경에 관심을 갖고 국제기구에 관심을 갖고 엄마가 좋다는 것이다.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방글라데시파견 30준년 글을 쓰게 되었다. 먼저 오마이뉴스에는 간간히 썼다. 충남 세종대전커뮤니티 만나는 이야기도 ...그것도 코로나을 걸려서 아프고 난 후의 이야기다. 그릇, 차 , JOCV....딸이 공부을 안하면 내가 써온글은 아무 소용이 없다.
대전시 공무원들의 경우에 보도자료가 나가는 다음날에는 보통 보도자료낸 공무원은 자리을 지켜야 하는데 그다음날은 휴가다. 자리을 지키지 않는다. A4용지 한장이나 두장쓰고 말이다.
정신적인 노동이다. 그리고 초고다 ,다시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타이핑으로 직접 치니 철자도 안맞고 문법도 ....그리고 용어 해석과 사진설명이 있어야 한국인들은 ...해외봉사단얘기는 신앙의 간증이 아니다. 외국인들의 삶이야기 이고 유교권이야기가 아니다. 아랍권도아니다. 힌두교도 아니다. 회교도 아니다. 방글라데시라는 서남아시아의 이야기다.
한국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야기와 주택가에 사는 이야기라도 국회의사당앞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나는 국회의사당 앞에 주택사에 살아사 아침마다 이른아침에 산책을 했다. 그들은 아침에 국회의사당앞에서 가라데을 연습한다. 방글라데시의 노을은 한국의 붉은 노을이 아니다. 보라색이 들어간 노을이다.
사진이 필요해서 보고서에 제출한 사진이 생각이 나서 KOICA에 설날을 앞두고 전화을 햇는데 자기들은 보고서을 10년만 보관한다고 나보고 방글라데시 사무소에 전화을 하라고 했다. 한데 내가 알기로는 봉사단원들의 보고서는 외교행랑을 통해 KOICA 로간다.
방글라데시에 전화을 햇는데 안받았다. 네이버에 블로그에 올리는 것을 포기하고 3개월후에 브런치스토리에 올리었다.동기에게 전화해서 물으니 자신들의 이야기는 안햇으면 좋겟다고 햇고 사진도 ...동료간의 이야기가 있으면 글이 더 산다.방글라데시에는 선교단체가 많아서 서로 사이가 안좋은 것으로 안다. 그만큼 이권다툼이 클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용히 있었다.나는 길을 내준다는 소리도 들었다. 내가 UNV로 나갈때 나을 추천해주신분들에게 누을 끼칠수가 없었다. 방글라데시 대사관에 근무하셨던 이우정 참사관이자 외교안보연구원에 계셨던 분, KOICA에 이형덕 이사님.충남대학교에 교수님....참아야 했다. 나에게 부당햇던 눈물나는 순간도....내가 잘해야 내 후배들에게도 기회가 되는 것이고.3기선배가 UNV을 나갔다 오셨는데 말을 아끼었고 조심하라고만 했다. 한시간만 만났다. 내배경이 그러니 내 가족만 단속하고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을 했다. 내가 UNV로나간다고 하자 동기들이 자기들도 나간다고햇다. 나는 내가 나간다고 나선것이 아니다.
방글라데시 해외봉사단 다녀 온 후에 어느날 KOICA에서 연락이 왔었고 이내 UNV지원서와 추천서 네장이 왔다. 난느 아무생각이 없이 대학졸업생들은교수들이 추천해주는 것이 그때 당시로는 일반적이 었다.
그리고 나는 부탄에서 일하면서 외국인 전문가들에게도 눈에 들었는지 농업성에 펙슈에 새책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느 임업전문가는 항상 웃으며 대해 주었다. 백인이었는데 이름을 여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나는 UNV계약만료시에 국제농업개발기금IFAD와 국제식량농업기구FAO에 후보자가 되었다. 그리고 부탄에서는 ABC사업에 일원이 되어 줄것을 제안받았고 호텔에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UNV프로그램오피서가 부탄에 대한 현황자료을 SNV네덜란드 자료된 것을 나에게 건네주어서 한국에 귀국해서 KOICA에가서 김인인가 방글라데시 소장이엇던 분에게 건네주었다. 서남아시아 담당자에게 ...방그라데시와 부탄 담당자에게 ..그러면서 내가 IFAD와 FAO에 후보자 오른 것은 말을 못하고 내려 왓다. 볼일 다 보았다는 태도들이었다.
부탄에서는UNV가 도착하면 의전에 따른다. 먼저 UNDP 부탄대표에게 인사을 가서 차 한잔을 마신다. 일본인여자분인 아키꼬나이토유게엿다. 나중에 들으니 일본에 황족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교부에 들어가 담당자을 만난다. 네덜란드 UNV코디네이터 식이고 아내가 SNV프로그램 오피서가 코치 했을 것이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을 들으니 아내가 네덜란드 귀족이라고 한다. UNV프로그램오피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던 네덜란드 후예라고 들엇다.요즘은 국제기구에 3개월 6개월을 일하다 돌아온다.
나는 2년을 하고 돌아왔다.저을 추천해주셧던 분들께 감사합니다. 국제협력은 귀족만 나서서 하는 것이 아닙닏3ㅏ. 밀양에 댐을 세우셧더군요. 제가 감히 인제라 말하지 않습니다. 한사람을 띄울때 얼마나 많은 뱃사공들이 노을 젓겟습니까?국제협력이 누가 돈을 가지고 있느냐 건물을 많이 짓느냐가 문제가 아니라고생각합니다.
네덜란드에 튜울립가격이 폭락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길에 나가게 되엇다고 합니다. 그당시에 네덜란드는 세금을 집에 있는 커튼의 길이에 따라 세금을 매기었고 나중에 빈건물이 남아 돌아 문제가 되자 그냥 빈집에 들어가 살라고 했다는 군요.
제가 부동산 분양임대을 하다가 유치권행사가 들어오고 건설관계자가 자신의 지인들을 건물에 수도세와 전기세 .,엘리베이터세만 받고 들어와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빈집들은 매일 아침 베란다 문과 창문들을 열어두는 것이 고역이더군요. 아침에 출근해서 빈호실에 문의 비밀번호을 터치해 문을 열고 베란다 문을 열어 신선한 공기가 돌게 하고 퇴근 무렵에는 다시 베란다 문을 닫습니다.... 그래도 비가 오고 하면 냄새가 나고 나중에는 곰팡이가 쓸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겨울이면 도심형 생활주택이 하자로 배관등에서 물이 새기도 하고 마르지 않으니 나중에는 곰팡이 가 쓸어서 문장동에 대전원예농협에서 숯곰파이 제로을 빈호실에 사다 놓고 요. 그돈 회사에 청구도 못했네요.코로나로 항균밴드을 사다가 네이버에서 샀나 사서 엘리베이터에 붙이고 그것도 계속 갈아 붙이고 코로나라 엘리베이터 청소도해야 했고...
새입자들은 하자 보수건으로 전화하고 소화기 벨이 울린다고 한밤중에도 전화하고 ..그래서 주택관리사들이 자격증만 따고 일을 못한다고 합니다.자격증 선전만 하고...
대전시내 아파트들이 빈집으로 있으면 새집이 헌집 됩니다. 건축자재등 유치권도 좋지만 빈 아파트 건물은 살리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창동 그라시아 아트빌인가에서 에코토ㅍ아에서 검색을 하면서 유럽에 건설회사도 검색했었지요. 유럽에는 건설유지 관리 회사들이 많은 것 같더라구요.그리고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제가 살던 방글라데시에 주택가에 벽은 벽지을 바르지 않고유성페이트을 씁니다..
KOICA에서도 봉사단을 파견시에 개인혼자서 살게 할 것인지 아파트등에 모여서 한국인들끼리 살 게 할 것인지 알아서 결정하세요.
좋은 곳에서 파티을 즐기면서서 3개월6개월.1년 .현지어도 모른채 살다온 후배님들에게 제가 이야기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선배에게 인사도 없이 나 잘사는 사람이야 명문대 나왔어 그분들에게 제가 무슨 사람으로 보일까요?저는 지방대 나왔고 고등학교시절에 다양한 활동을 햇지만 고1에는 상위권이라도 고2부터는 이과을 선택햇고 합창부을 해서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하지만 걸스카웃을 하면서 겨울에 눈이 오는 께룡산의 남매탑을 걸스카웃선후배와 무용선생님과 국민윤리 남자 선생님과 그 친구분정말 좋은 추억주어 감사합니다.동학사까지 내려오자 이제는 막걸리을 마셔도 된다며 묵을 먹던 생각이 납니다.공부잘하는 학생에게는 없는 추억입니디, 우리 고등학교는 대전성모여고 였는데 걸스카웃실이 따로 있었고 캠핑장비가 일절 구비가 되어잇어서 걸스카웃 활동이 다른 학교에 비해 돈이 덜들었어요.
나중에 걸스카웃 캠핑을 가서 들어보니 학교 운동장에 치는 테트며 코펠등을 개인이 준비해 왔다고 하더라구요.,
방그랄데시에 그라민뱅크에 유누스도 보이스카우트 출신이더라구요.하지만 방글라데시는 부유층이 보이스카우트을 하고요.,유누스는 참고로 치타콩에 대학에서 교수을 하다가 빈민구제로 은행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미국인과 결혼읗 햇었답니다. 제가 그 분의 책을 읽다가 덮은 것은 대출을 받은 여성들이 다섯명이 짝을 이루어 서로 격려을 하는 것인지 감시을 하는것인지 북한의 5호담당제라는 것이 생각이 나서 좀 조심스럽다는 생각입니다.소액대출로 농업이나 수공예품을 헤서 생활하는 분들에게는 소액대출로 단기간에 이익창출이 가능하지만 더이상 규모가 커지는데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오늘 저녁은 읽던 책을 다시 펼쳐볼까도 생각이 듭니다.
제가 선후배 동료 흉을 봤습니다.사람이 입이 없어서 말을 못할까요.내가 침묵하면 발전이 없이 위기가 올것이고 내 자식이 어머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더 할 나위 없습니다.이권싸움이라는 생각과 내가 나서는 것보다 돈있는자가 나서는 것이 나을 것 같고 지나가는 소리로 옷도 잘입어야지 돈도 있어야지 하는 소리에 자존심도 상하고 모임장소을 배려해서 그시간에 가면 없는 사람들...알아서 하세요.아파트에서 사십시요.서울에 예전에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나중에는 평수대로 논다고 했습니다. 저는 나이드신 후배님이 코바 홈페이지에 글을 적어달라고 해서 올렸습니다. 그분이 카자키스탄인가UNV댜녀오셔서 잘 하리라 봅니다. 자신의 자식에게만 친척과 공유하지 않고 삶의 지혜을 함ㄲ{ 나누기 바랍니다. 눈도 상당히 높아져서 돌아 오셨을 것입니다. 보다 큰 세계 많은 분에게 알려주세요, 보건 분야 라고 하셧지요,나이가 70을 바라보니 시간이 많지 않네요.,
제가 나이드신 분을 반대하는 것은 제가 부탄에 있을때 일본에서 UNV로 50대인가 남자 분이 오셨는데 부탄 팀퓨가 고산지대이다 보니 해발 2400m에서 2700라서 늦가을 이었나 몸이 안좋아서 2주만에 부탄을 떠났어요.그분이 가면서 저에게 일본 식료품을 주었는데 잘 먹으라고 나는 그 식료품을 가지고 다니며 부탄분들에게 거의 다 나주어주었어요.간장인가 한국조미료인가가 비슷해서 그것만 제가 사용하고요..다들 받으며 웃었습니다.
한국에 고층아파트은 유럽인 설계인가요?고산지대 사람들 설계인가요? 어른들은 혈압에안좋을 것 같아요.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제가 부탄의 네팔리나 인도의 티벳탄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우리나라도 일본과 독립운동을하면서 중국에 유력인사나 일본에 유력인사들과 결혼을 한 것은 아닐까 싶어 서 티뱃애들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참고로 그당시에 농업부 장관부인은 티벳여자 엿습니ㅏ. 상당히 예뺬어요.한데 농업부장관은 저을 안좋게 보았고 ...부탄무역산업장관님이 친절히 대해주시고 행정장관으로 세계신기록인 다와시링장관이 친절하게 대해 주셧습니다.세해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지자체 시장님이나 도지사 님들도 새해에 외국인근로자나 유학생이나 기업에 근뮤하는 분들과 떡국한그릇하는 것은 어떨까요? 새해에 윳놀이을 한 번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외국에 많은 것을 지원하는 것만 국제 협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떡국 담는 그릇 .대접은 한국에 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장 그릇이 없으면 어떻습니까?프라스틱 일회용 대접에 떡국한그릇 외국인과 함께 말입니다. 설날 연휴가 며칠되니 말입니다. 김치는 자연히 각지방마다 다르다는 것도 알리고 말입니다.외국에 직접투자도 좋지만 국내에 찾아온 외국인들을 적으로 대해서야 되겟습니까?그들와 포카와 체스을 하자면 우리는 장기와 윳놀이을 한번 하자고 하는 것은 ?국제대회로 승격도 시키고..
방글라데시에서 일본JOCV 와 스포츠 게임을 하는데 여자 대표가 게임을 정하는데 종이에 오제미을 하는 법을 영어로 적어와서 설명을 햇고 그때 스포츠게임에 오제미와 베드민턴과 축구을 함께 했습니다.
내부에서 서로 비난하기보다 새로운 일로 협력하는 것이 상생이 아닐런지요
버스안에서 본 애기을 안은 뱅갈리부부가 생각이 나서 괴롭습니다.저에게 도움을 요청햇던 가요저는 식당에서 잃하느라 피곤해서 그분들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그리고 방글라데시 소요사태을 두라인가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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