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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그랬었지

1960년대의 한가위 회상

by 운해 박호진

백양나무 늘어선 신작로에 우리를 내려준 버스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아난다. 아버지는 금세 산길로 접어든다. 형들이든 보따리에는 술과 과일, 전 등 제물과 제기가 들어있고 돗자리도 들려있다. 떡갈나무 사이로 한참을 오르면 전망이 확 트인 능선에 낡은 비석을 품은 무덤이 있다. 고조부 묘소. 아버지의 장황한 설명을 듣고 향을 피우고 가져온 음식을 차리고 재배(再拜)를 한다. 아래로 내려오며 증조부, 조부, 백부…. 누구누구하고 설명을 듣고서 절하고. 하지만 국민학교 다니던 나는 무료하기만 하다. 도토리나 주워 호주머니에 넣으며 빨리 끝나기만 바란다. 그게 끝이 아니다. 멀리 떨어진 집성촌에 가서 여러 친척댁 들려서 인사드리고 한나절이나 지나야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물론 큰 수확도 있다. 설날처럼 세뱃돈은 아니지만 다니면서 얻은 용돈이 있다. 지폐를 꼬깃꼬깃 호주머니에 넣고서 몇 번이나 만져본다.

제사는 한 해에 여남은 번 지내는 듯하였는데 제삿날이면 종일 기름진 음식 냄새가 구미를 당긴다. 그러나 제례를 한밤중에 치르니 아이들은 음식 구경도 못 한다. 놋쇠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면 이미 어른들은 음복(飮福)을 다 한 다음이다. 아침 밥상에 나물은 보이나 생선 토막은 어른들 차지였다. 시골서 온 고모님은 친정에 왔다고 며칠씩 유하고 가시니 조금 남은 기름진 음식은 손님상에 올린다고 손도 못 대게 한다. 그러나 명절 차례는 사뭇 다르다. 아침에 제상을 차리고 아이 어른 모두 다 모여 지내니 먹을 복이 터진다. 손꼽아 기다리던 명절은 아이들에게는 종합 선물세트 같은 것이다. 아이들은 학교가 휴일이라 즐겁고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며 용돈을 받는 설렘이 있다. 추석은 때가 때인 만큼 먹거리가 풍성하다. 평소에 못 먹던 갖가지 전이며 고기뿐 아니라 떡이며 과일이며 한과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어머니는 추석 음식은 쉬 상한다며 나물이며 생선이며 다시 데치고 굽기를 반복하여 수고스럽지만, 나는 끼니마다 배불리 먹어 좋았다.


땅거미 지면 동네 아이들이 극장 주변으로 놀이를 간다. 극장 앞은 영화 간판을 밝히는 불빛으로 환하고 영화를 보던 안 보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저마다 화약 딱총이나 불꽃, 폭음탄을 챙겨온다. 나무로 만든 고무줄 딱총에 종이화약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기면 땅 땅하고 제법 큰 소리가 난다. 불꽃이라 부른 폭죽은 나무젓가락 끝에 화약을 다져 넣은 종이통 대롱을 매달고 도화선 꼬리가 있는 구조이다. 모래나 돌멩이로 고정해 세우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쉑쉑 소리와 함께 불꽃을 흩날리며 높이 솟아오른다. 요즘의 불꽃과 비교가 되겠냐만 멋지게 날아오르면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즐거워했었다.

폭음탄은 극장 앞 인파 구경 나온 처녀들 놀라게 해 주는데 적격이다. 댕기 땋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누나들 치마 아래에 불붙인 폭음탄을 슬며시 던져 넣으면 이내 “꽝”하고 고막을 찢는 폭발음이 난다. 기겁한 아가씨가 혼이 빠지고 동행한 청년들이 범인 색출에 나설 땐 이미 아이들은 골목으로 흩어져 달아난 뒤다.


밤이 어슥해지고 보름달이 중천에 뜨면 가로등 없는 호젓한 뒷길로 짝지은 남녀들이 손잡고 거니노라면 저만치서 지켜보던 아이들이 큰소리로 놀려댄다. “얼레리꼴레리 나는 봤다, 나는 봤다!” 요즘이야 한참 더한 일도 남의 시선을 끌지 못하지만, 그 시절은 남녀가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소문이 나고 허물이 되는 시절인데 감히 손을 잡다니! 되돌아보면 순박하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부러운 그것 없던 시절이었다.

조기교육, 입시경쟁, 취업, 결혼, 맞벌이, 가정폭력, 아파트 가격 급등, 기후 위기, 자살, 인구 절벽, , , , 답답한 단어들이 뉴스와 SNS에 가득한 세상. 다 잊고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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