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yes or no로 나뉘는 논리학이 아니다
도넛 경제학이라 불리는 경제학 이론을 아는가? 이는 우리가 생태적 한계를 넘어 무한히 성장할 수 없으므로 - 지속가능하게 되기 위해선 시장의 크기가 사회적 기초를 충족하는 최소 크기와 생태적 한계를 넘지 않는 최대 크기 그 사이여야 함을 역설하는 경제 이론이다.
이 이론은 꽤 최근에 제시되었다. 생태주의 측에서 인기를 끌고 있으나 아직까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다만 이게 맞던 틀리던 이 이론이 제시되고 또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 자체는 곧 우리가 지금까지 외부요인으로 인식해왔던 환경이 곧 우리의 경제에 크게 개입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전망이 현대 사회에서 대두되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이것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넛 경제학이 맞느냐보다 중요한 건, 환경적 제약이 경제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이제 주류 담론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디지털로의 확장, 우주로의 확장, 신 자원 개발 등의 과학 기술 발전으로 좀 더 성장해나갈 수 있겠지만, 기술 낙관적인 시선을 배제한다면 이 역시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즉, 지난 편에서 했던 이야기는 단순히 내가 땋아놓은 이야기는 아니다. 지난 편에서는 기후 정의를 간단히 소개하고, 기후 정의의 시선 아래 정의롭지 않은 사회는 구조적으로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주 근거로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었는데, 이번 편에 절차적 정의와 탈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하기로 했었던 것 같다.
다만, 지난 편과는 시선을 약간 달리해서 보자. 그래서 탈성장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탈성장이 '이상론'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성장 감속은 곧 누군가의 일자리, 지역경제, 세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즉, 탈성장이 현실적이려면 앞서 언급했던 절차적 기후 정의 개념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전환의 정도가 기술, 시장이 아닌 체제 규모이므로, 이 맥락에서는 7편에서 언급했던 정의로운 전환 개념이 더욱더 중요해진다. 즉, 전환으로 인한 비용과 위험을 사회 전체가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다.
지난 편에선 대략 이 정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산업 전환 지역/노동자의 실질적 교섭권
사업성&위험&대안 등 정보 공개의 투명성
재교육, 소득 보전, 지역 재투자 등의 정책
어떻게 보면 뜬금없이 언급하는 느낌이었는데, 이것들이 대체 왜 언급되어야 했을까?
만일 산업 전환 지역/노동자의 실질적 교섭권이 없다면?
탈성장이나 탄소 중립을 위해 석탄 화력 발전소를 폐쇄한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바로 해당 지역 주민과 노동자다. 만일 이들이 교섭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들은 단순히 환경을 위해 희생당하는 존재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못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강한 저항을 부른다.
절차적 정의의 핵심은 결과가 나오기 전, 과정에 참여할 권리다. 실질적 교섭권이 있어야 노동자는 "해고 반대"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공장 폐쇄 시기 조절", "대체 산업 유치", "전환 과정 참여" 등을 요구하며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다. 즉, 이는 진정으로 전환의 리스크를 사회가 함께 짊어지게 만든다.
만일 사업성&위험&대안 등 정보 공개의 투명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교섭권이 있어도 정보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기업이 "넷제로 흐름 때문에 경영이 어려워 ~~지역 공장 문을 닫는다"고 할 때, 그것이 진짜 기후 위기 대응 때문인지, 경영 실패를 감추기 위함인지, 아니면 다른 이윤 추구를 위함인지 노동자는 알 길이 없다. 정보의 비대칭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전환을 가로막는다.
투명한 정보 공개는 합리적인 대화의 전제 조건이다. "이 산업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지", "전환 시 발생하는 실제 비용은 얼마인지"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노동자와 지역 사회도 무리한 요구가 아닌 현실적 탈성장 스케줄을 함께 설계할 수 있다.
만일 재교육, 소득 보전, 지역 재투자 등의 정책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탈성장은 필연적으로 기존 고탄소 산업의 축소를 의미한다. "지구를 위해 일자리를 잃으라"는 요구는 그 자체로 폭력이고, 당장의 월급이 끊기는 공포 앞에서 기후 정의 따위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념은 배부를 때나 의미가 있는거다.
기후 정의와 탈성장은 서로 관련성이 깊은 관계다.
특히, 탈성장 없는 기후 정의는 성립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기후 정의 없는 탈성장은 또 다른 폭력일 뿐이다.
결국 이 청사진의 지향점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미래 사회다.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난, 수많은 존재들과 공존하는 사회상 말이다.
물론 이런 세세한 것들을 신경쓰지 않은채 완벽한 계획을 필두로 빠르게 전환하는 것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민중이 일일히 다 합의하는 건 정말 느린 방법이고, 또 정말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반대로 이를 이끌겠다고 자진하는 '강한 리더십'이 진두지휘하는 완벽한 계획은 효율적이고, 또 빠를 것이다.
그러면 그 '강한 리더'를 우린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믿어야 하는가?
“What I criticize under the name Utopian engineering recommends the reconstruction of society as a whole, i.e. very sweeping changes whose practical consequences are hard to calculate, owing to our limited experiences. It claims to plan rationally for the whole of society, although we do not possess anything like the factual knowledge which would be necessary to make good such an ambitious claim.”
“Aestheticism and radicalism must lead us to jettison reason, and to replace it by a desperate hope for political miracles. This irrational attitude which springs from intoxication with dreams of a beautiful world is what I call Romanticism. It may seek its heavenly city in the past or in the future; it may preach ‘back to nature’ or ‘forward to a world of love and beauty’; but its appeal is always to our emotions rather than to reason. Even with the best intentions of making heaven on earth it only succeeds in making it a hell – that hell which man alone prepares for his fellow-men.”
― Karl Popper,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총체적 목표를 ‘단기간에’ 달성하려는 실행 방식은 곧 권력 집중을 유도한다.
예시를 들어볼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그의 논리 안에서 완벽한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을 받아들인 국가들이 그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고,
결국 이는 대부분의 공산주의 정부가 독재체제가 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러 이해관계자들로 이루어진 국가는 필연적으로 내부 이견이 생기고, 하려고 했던 계획이 지연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서로 이야기하며 빨리빨리 풀면 괜찮겠지만, 서로의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은 사실 꽤 시간이 걸린다.
큰 목표를 단기간에 달성하려고 하면 이는 곧 비효율로 여겨진다. 효율의 이름으로, 권력 집중은 정당화되고 집중이 된 그 시기에는 실제로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많은 곳을 고쳐야 하는만큼 그걸 고치기 위한 각종 공구들을 정부에게 쥐어준다면 분명 일은 잘 할 것이다.
다만 이후 그걸 돌려받지 못한다고 해도, 설령 그 공구가 어디를 향한다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을 것이다. 그 권력이 선량하고 헌신적이면 좋겠지만, 강한 힘이 주어진다면 타락의 유혹 역시 함께 찾아오기에 이 역시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권력에게 도덕성을 기대할 순 없다.
탈성장 역시도 마찬가지의 문제에 봉착한다.
어렵고 급한 문제일수록 그걸 한 번에 설계하고 실행하는 소위 '유토피아적 계획'은 꽤 매혹적인 선택지다.
그러나 기후 정의의 관점에서도, 또 역사의 관점에서도, 그래선 안될 것이다.
그러면, 이 자본주의라는 체제 전체를 뒤바꾸겠다는 계획은 어떠한가?
물론 대량생산해내고, 그걸 또 펑펑 소비해대는 행태가 기후 변화 해결에 있어 큰 병목인 것은 맞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탈성장은 설득력 있는 비전일 수도 있다.
문제는, 탈성장이 요구하는 조건들—실질적인 교섭권, 충분한 정보 공개, 재교육과 지역 재투자—이 모두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 과정은 앞선 위험들을 고려했을 때, 탈성장 계획의 정당화를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느릴 수밖에 없다. (빠르게 이행할 수 있는 '강한 리더' 전략이 정당성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협상과 개선을 통해 점차 나아가야 할텐데, 이것이 과연 기후 변화의 시간 프레임에 맞아 들어갈까?
적어도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은 빨라야 한다.
탈성장은 관점에 따라 모범적인 답안일 수 있으나,
... 기후 변화 대응은 단지 ‘미래 세대의 환경’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훨씬 현재적인—'지금 살아가는 우리'와 '앞으로 살아갈 이들' 모두의 삶 자체에 관한 문제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범적인 답안’이 아니라, 가능한 피해를 가장 줄여줄 실제적인 답안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답안이 초래할 사회적 리스크 역시 피할 수 없는 고려 대상이다.
- 8편 중
이 지점에서 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사실 이 문제가 원래 그런 문제기 때문이다.
이 시리즈는 기후 변화라는 주제를 다룬다. 익숙한 질문인 “기후변화는 왜 중요한가?”에서 출발해, 우리는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차근차근 짚어나갈 것이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데이터는 물론, 사회적‧정치적 맥락까지 함께 고려하면서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고의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지루한 구성 안에서 어쩌면 새로울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펼쳐보려 한다. 이를테면, 이성적인 언어로 감정적인 현실을 서술하거나, 점진적인 시각에서 어떻게 급진적인 정책을 도출할 수 있는지를 서술하는 방식 말이다. 때로는 감정적으로만 보이던 환경 담론을 정책의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일도 포함될 것이다.
... 내가 진짜 바라는 건 독자들이 이 이야기를 통해 한 번쯤 더 고민해보는 것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새로운 걸 배우는 것도 의미 있지만, 전혀 다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더 많은 통찰이 나올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리즈가 당신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흔들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 1편 중
나는 최소한 기후 변화 대응의 시간선 내에서는 자본주의라는 변수를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미래상에 대한 대책이 탈성장이라는 것에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나 기후 변화에 대한 대책이 곧 탈성장이라는 것에는 그것은 복잡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생각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정책은 시장을 고려해야 하며, 너무 기술 의존적이어서도 안되지만 기술에 대한 투자 자체는 늘려 어떻게든 더 나아질 가능성을 모색해놓아야 한다. 각 정부 객체가 환경, 그리고 기후 변화라는 목적을 최우선으로 하지는 않을테지만 그럼에도 기후 변화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위협이므로 그 위험성에 맞는 대우 정도는 국제 사회가 해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들을 해왔다.
비록 마무리를 '이상'을 '현실'이 비판하는 구도로 그리긴 했지만,
이런 담론에서 '현실'이란 말이 가리는 '진실'들 역시 많다.
이제 슬슬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것 같은데, 마지막 두 편 정도는 지금까지의 근거 및 논리들을 바탕으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해보고 싶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긴 흐름을 따라와주느라 고생 많았다.
가능하면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