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세상을 외치다

그저 비합리적인 감성팔이일 뿐일까?

by 강진영


‘비과학적 환경주의’와 ‘합리적 기후 대응’의 경계는 생각만큼 명확하지 않다. 어떤 주장들은 누군가에게는 감정적 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생존을 위한 상식적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결국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또 어떤 가치를 우선하는지에 따라 ‘합리성’이라는 기준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 후보의 말처럼, 과학적 근거가 곧 합리성의 충족 조건일까? 애초에, 우리가 믿는 ‘기후 과학’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 어디까지가 과연 ‘합리적’일까?
- 1편 중


여기에 더해 기후 변화 대응은 단지 ‘미래 세대의 환경’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크고, 훨씬 현재적인—'지금 살아가는 우리'와 '앞으로 살아갈 이들' 모두의 삶 자체에 관한 문제다. ... 그렇기에 우리는 ‘모범적인 답안’이 아니라, 가능한 피해를 가장 줄여줄 실제적인 답안을 선택해야 한다.
- 8편 중


단어 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정의(正義)란 곧 바르고() 옳은()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바르고 옳은 것인가?

우리가 지금 정의라고 말하는 것들은 정말 바르고 옳은 것들일까?


기후 대응을 하지 않으면 더 많은 피해가 생긴다. 하지만 대응을 하더라도 역시 피해는 발생한다.그리고 때로는, 전환하지 않았을 때 피해를 보지 않을 이들이 전환 때문에 새로운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 하지만 삶의 방식을 바꾼다는 것, 그건 단순히 "좀 불편하면 되잖아" 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공익을 위해 불편을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말이 실제로 그를 지켜줄 리 없다.
- 7편 중


변화를 말하는 것은 어렵다. 바르지 않고,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변화를 말하지 않는 것이 무조건 바르고 옳은가?


7편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옳은 말이 우리를 지켜주지는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나 타협해야 하는가? 과연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 말을 옳은 말이라 부를 수 있는가?

설령 옳은 말이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해도, 과연 우리를 지켜주는 말만 해야 하는가?

우리를 지키다의 기준은 또 무엇인가?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다음으로 이어질 ‘탈성장’ 이야기는, 흔히 지금까지 다뤘던 ‘지속 가능한 성장’ 담론과는 전혀 다른 맥락 위에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현재 체제인 자본주의의 근간인 ‘성장’ 자체를 부정하기에 탈성장 담론과 같은 이야기는 ‘이상적인 이야기’로 여겨지기 쉽다.
- 17편 중


무언가를 바꾸자는 이야기는 단순한 이상론에 불과할까? 왜?

단순히 무언가를 바꾸자고 해서 이상론으로 여겨지는 걸까? 아니면 이야기의 어떤 요소가 비현실적인 건가?




우리는 각자의 판단기준 아래서 살아가고 있고, 각자의 정의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전편에서 예고했듯 이 편부터는 기후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정의의 시선으로 기후 변화를 바라보는 이들에 대해 다룬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게 과연 정말로 정의일지는 곧 각자가 생각해볼 문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정의를 다루는 여러 편 중 이 편은 기후 정의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정의라는 렌즈로 지속 가능한 성장이 불가능함을 논증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앞서 지속가능한 성장 이야기를 시뮬라크르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던 것과 같이, 이 역시 또 하나의 시뮬라크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니 이러한 점들을 염두하고 이 글을 따라가보며, 같이 이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편과 다음 편의 경우 긴 호흡으로 논증을 쌓아갈 예정이니, 읽을 때 비판적으로 읽되 그 질문을 마음속에서 계속 곱씹어보셨으면 한다.


기후 정의?


사실 기후 정의라는 개념이 확실하게 무엇이다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기후 정의에 대한 담론 자체를 따라가본다면 기후 정의라는 개념이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소득 국가는 육류 소비와 국제 공급망을 통해 농식품 부문의 배출을 크게 늘려왔지만, 동시에 스마트팜·재생에너지 등 대응 기술을 도입할 자원과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반대로 저소득 국가는 생계를 위해 산림을 경작지·목초지로 전환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전환이 다시 기후 변화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스마트팜 같은 기술에 접근할 자원이 부족해 적응 능력도 상대적으로 제약된다.
- 19편 중


초기 기후 정의 담론은 글로벌 노스글로벌 사우스 간 기후 불평등에서 출발했다. 정확히는 온실가스 배출과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 간 불일치로, 주로 선진국으로 구성되어 있는 글로벌 노스가 온실가스를 많이 배출하는데 반해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는 개도국 중심으로 구성된 글로벌 사우스가 더 크게 입는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현재 기후 변화 담론에서, 온실가스 배출은 기후 변화를 가속화하고 이는 곧 다른 객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여러 현상들을 발생시킨다. 그러니 온실가스 배출을 곧 잘못으로 정의해보자.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의 형태는 여러 가지다. 피해를 입은 객체에 대해 원조를 해주는 것도 책임의 형태 중 하나로 볼 수 있지만, 잘못을 덜 저지르는 형태, 즉 온실가스 배출 감축 역시 곧 그 잘못에 대한 책임으로 볼 수 있다.


기후 불평등이라는 문제 상황을 해결한다고 했을 때, 바로 떠올릴 수 있는 직관적인 해결책은 바로 각기 다른 배출량에 근거해 이에 따른 책임 역시 다르게 지는 것이다. 즉, 책임을 배출량에 근거해 분배하는 개념이다.


이 책임을 분배하는 방안은 여러 가지인데, 가장 널리 활용되었고 또 현재 활용되고 있는 방안은 누적 배출량이나 인구수 등과 같은 변수들을 고려하지 않고 특정 연도 배출량을 기준으로 감축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이는 지불 능력 원칙에 입각하여 현 시점에서의 감축 및 보상 능력을 기준으로 감축 목표를 설정한다. 현재 더 부유하고 앞선 기술을 가지고 있는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주로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이를 현상유지 및 기득권인정적인 성격을 가진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들은 각국의 배출량 차이를 주어진 것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오염자 부담 원칙을 토대로 역사적 책임에 근거해 책임을 배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경우엔 역사적 책임의 시점을 어디로 잡아야 하나-온실가스 배출의 효과를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배출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에 대한 의견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또, 책임을 묻는 대상은 국가인데 그 책임을 지는 대상은 국가 내 개인이라는 점에도 몇 가지 잡음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기후 변화 대응의 정도를 어떻게 분배할 것이냐의 문제인 분배적 기후 정의 뿐 아니라 이를 결정하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동등한 참여를 요구하는 절차적 기후 정의 개념 역시 대두되었다.


주로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원주민, 피해 당사자, 청소년 및 미래세대 등의 영향받는 자들의 입장은 직접적으로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되기 힘들고, 오히려 기업 및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데 더 유리한 환경임을 지적하며 실질적 참여 및 그 참여를 위한 알권리 보장, 정보 격차 해소와 같은 조건 마련과 같은 대안들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기후 정의라는 개념이 사회운동 진영에서 쓰이며 급진화되는 과정에서 이 기본 뿌리에서 더 나아가는 지점들도 분명히 있지만, 기후 정의라는 개념의 기본적인 토대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기후 정의라는 개념 아래서 볼 때, 과연 지속 가능한 성장은 가능한 것일까?

지금부터는 철저히, 한 번 제대로 기후 정의와 탈성장 담론에 이입해서 써보겠다.


성장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까지 '기후 변화 대응이 어렵다'고 말했던 건 감축 속도가 물리적 한계&시간 제약에 막히거나, 이를 무시하고 진행했을 때 감축 부담이 비용의 형태로 약자에게 전가되기 쉽기 때문이었다.


이 현상의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선택한 자본주의라는 기반 체제일 것이다. 생산&소비 확대, 즉 성장 기조를 유지한 채 배출 감축을 효율 개선으로서 수행하려고 하니 감축이 그만큼 더딜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이로 인해 상승하는 비용은 저소득층 등 현재의 취약계층에게 더 큰 부하로 돌아오게 된다.


또한, 현재 체제의 경우 많은 비용을 외부화시키고 있다. 이는 지속 가능한 성장의 경우에도 동일한데, 청정에너지, 배터리 등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이에 필요한 광물을 채굴하고, 토지를 수탈하고, 또 제작 및 설치, 운용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적 부담이 특정 지역에 집중될 수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이라는 말이 부정의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기후 정의라는 렌즈를 끼웠을 때 이것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정의를 추구하는 이유가 단순히 약자를 신경씀으로서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가지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르지 않고, 옳지 않은 사회가 가진 본질적 모순은 결국 사회 구조의 붕괴를 야기한다. 이는 사회가 그 사회 체제를 유지할 명분이 흔들리는 상황은 곧 항시적으로 피지배층의 반발이 일어날 가능성을 공고히 하기 때문이다.


한때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자본주의 붕괴론과 비슷한 맥락을 띠고 있지만 살짝 다른 점은, 기후 변화 담론의 경우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붕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던 노동자 계급의 혁명에 더해 이상기후라는 외부 변수가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이상기후라는 외부 변수로 인해 체제가 붕괴된다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이상적인 사회주의로 넘어갈 일도 없이 그냥 말 그대로 사회가 붕괴되고 끝날 것이며, 이러한 위협의 존재 자체가 오히려 체제를 붕괴시킬 정도의 내부 충격(꼭 '노동자 계급'의 '혁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다.


이는 무조건적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에서의 자본주의가 붕괴한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붕괴하지 않기 위해 자본주의가 유지되는 과정에서, 그것이 동시에 기후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이유를 반복적으로 재생산시킨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병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보자. 성장을 하기 위해선 결국 에너지와 자본을 더 많이 써야하니 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다. 이 상황에서의 기후 대응 전략 중 핵심은 결국 효율 개선이지만,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일반적으로 자원을 적게 투입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 산출물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그리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대응 기술을 억지로 도입하면 비용은 올라가고, 이는 정치적 저항에 부딪힌다. 이로 인해 감축 속도가 더뎌지면 이는 기후 변화로 인한 피해를 심화시키며, 이는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무조건적인 결론은 아니지만, 꽤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면, 이는 결론적으로 사회 전체의 성장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킨다. 현재로서는 이런 기후 정책 후퇴 메커니즘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므로 대부분의 경우에서 유효하다.


물론 미래엔 몇 가지 정도는 달라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정치적 저항에 부딪혀 감축 속도가 더뎌지는 단계인데, 이는 이를 넘을만큼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감축 속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낳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질 단계에서는 이미 기후 변화가 심해질대로 심해져 있을 가능성이 클 뿐이다.


즉, 지속 가능한 성장 계획은 지속 가능한 성장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를 뿐더러, 그 지속 가능한 성장 단계가 정말로 지속 가능할지도 모르겠고, 지속 가능한 성장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지속 불가능해질 가능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이제 누가 이상인가?


이상적이라는 말이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이라면,

현실의 물리적&정치적 제약을 무시하는 쪽은 과연 어느 쪽인가?


탈성장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


물론 성장이 이상적이라고 해서 곧바로 탈성장이 현실적이게 되는 건 아니다.


탈성장이 '이상론'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성장 감속은 곧 누군가의 일자리, 지역경제, 세수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즉, 탈성장이 현실적이려면 앞서 언급했던 절차적 기후 정의 개념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전환의 정도가 기술, 시장이 아닌 체제 규모이므로, 이 맥락에서는 7편에서 언급했던 정의로운 전환 개념이 더욱더 중요해진다. 즉, 전환으로 인한 비용과 위험을 사회 전체가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업 전환 지역/노동자의 실질적 교섭권이 전제되어야 하며, 사업성&위험&대안 등의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또, 재교육, 소득 보전, 지역 재투자 등의 정책 역시 당연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탈자본주의 자체가 정의로운 것이 아닌, 자본주의가 부정의하기에 탈자본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이니만큼 기후 정의라는 개념 역시 계속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개괄은 대략 여기까지고, 다음 편에서는 절차적 정의와 탈성장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 늦었습니다, 시간이 꽤 많이 흐른만큼 다음주~다다음주까지는 연재본 계속 내놓으면서 지난 글들 조금 다듬어보도록 할게요! (다시 보니 부족한 점들이 참 많이 보이네요 ㅎㅎ..) 다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진 정보들의 경우에는 한 번 갱신글을 올려서 독자분들께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게끔 하겠습니다. 제 글은 어디까지나 글을 작성한 시점에서의 논증이라는 점을 명심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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