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굴 위한 살기 좋은 나라인가

약자들의 정체성 싸움에서 ‘진짜 적’은

by 도나


「“ㅇㅇ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줄게” -> 이걸 본 뒤로 다른 사랑은 다 가짜 같다」

트위터(현 X)에서 수많은 리트윗을 탄 밈(meme)의 원본 게시글이다. 점심으로 마라탕을 먹을 때도 ‘포카’(포토카드) 사진을 찍으며 이른바 ‘예절’(예절 샷(shot))을 지키고, 여행을 가서도 관광명소 앞에서 솜 인형을 흔드는 영상을 찍어 올리는 게 ‘팬덤’ 문화이다. 그런데 하다 하다 시위 현장에까지 마음속 ‘그이’를 데려가다니, 정말이지 이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냐 말이냐. 약간은 지나친 듯하여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공감되는 팬의 행동. 그리고 그 팬을 비난하지도 비웃지도 않는 다른 트위터 유저(user)의 진지한 감탄 한마디가 화룡점정이 되어 우리를 웃게 했다. 그렇게 웃고 넘겼던 이 밈은 몇 달 후 2024년 12월, 국회의사당 앞에 나온 내가 외치게 됐다.


2030 여성을 중심으로 한 팬덤 문화가 이번 탄핵 집회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아미(BTS 팬클럽명)와 엑소엘(EXO 팬클럽명)이 함께 응원봉을 인증한 사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케이팝 문화에서 사이가 나쁜 것으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두 팬덤이 서로 응원봉을 맞대다니. 그들은 내가 고등학생일 때도, 대학생일 때도, 직장인일 때까지도 항상 싸우고 있었는데! 나라를 위해 과거의 악감정 따위 버린 팬들의 모습에 별안간 진지하게 감동받았다. 지난 계엄 사태 후 집회 현장에서는 이렇게 모두가 함께였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저마다의 ㅇㅇ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며 뭉쳤다. 올겨울뿐만 아니라 그동안 항상 인권을 위해 싸워왔던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 단체들도 목소리를 보탰다. 나도 응원봉을 들고 현장에 나갔다. 그리고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불빛들을 보면서 모두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자 다짐했다.




연대는 잠시 곧 분열이 생겼다. 성소수자 단체연대가 특정 아이돌 그룹이 연상되는 응원봉의 이미지를 집회 홍보 포스터에 사용한 것이다. 성소수자 단체는 팬덤 고유의 응원봉이 가지는 의미를 숙고하지 못했다며 사과하고 포스터를 삭제했다. SNS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해 거센 의견들이 오고 갔는데, 나는 이 논란의 원인이 ‘응원봉 동지’들의 갑작스러운 선 긋기라기보단, 약자들의 정체성 지키기 싸움이라 생각한다. 작년 초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유명 케이팝 가수가 신곡 제목을 <love wins>로 발표한 것이다.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라는 기념비적 구호를 남용한 것도 문제지만, 뮤직비디오가 이성애 커플의 이야기였다는 점이 논란의 핵심이다. 비난이 거세지자 가수는 신곡 제목을 조금 변경하는 것으로 끝냈다. 당시 목소리를 낸 당사자들에게 ‘예민하다’ 비난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명한 밈(“아… 교실 혼자 쓰나”)을 변조하여 “아 love wins 혼자 쓰나”라며 비꼬곤 했는데, 비난의 화살은 이제 “아 응원봉 혼자 쓰나”고 케이팝 팬들을 향하고 있다.


약할수록 깨지기 쉽다. 소수자의 정체성은 빼앗기기 쉽기에, 그것을 지킬 때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성소수자들은 그들의 언어를 성다수자들에게 자주 뺏겨왔으며(ex ‘임밍아웃’), 케이팝 팬들도 나이가 어린 여성이 주 타깃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에게 멸시당하곤 했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약자들의 정체성이 또다시 작게 쪼개지고 고립되어 서로 연결될 수 없는 상황이다. 약자들이 서로 간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에도, 강자들은 또다시 우리 공동의 무언가를 뺏는 중일지 모른다. 요새도 미남 배우를 닮은(?) 남성 청년들이 붕어빵이며, 야끼만두이며 겨울철 먹거리 장사를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약자들이 다들 저마다의 정체성으로 무장하고, 서로 인플루언서가 굽는 비싼 붕어빵 대신 싸고 맛있는 ‘붕어빵 스팟(spot)’이 어딘지 알려주는 그런 광장이 필요하다.



#일상비평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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