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보다 꼴사나운 자아도취
매년 여름마다 ‘록 페스티벌’에 간다. 8월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더운 날씨지만 이것이 로큰롤의 낭만이라 스스로 세뇌하며 음악과 축제 분위기를 물씬 즐긴다. 공연 문화 중에는 곡의 간주 구간에 “어이! 어이!” 하고 외치며 박자를 맞추는 것이 있다. 기존 멜로디에 관객들의 추임새가 더해져 공연 열기를 더 뜨겁게 만든다. 그런데 최근 페스티벌에는 유독 이 추임새가 과도하게 많다는 비판이 많다. 페스티벌 문화를 잘 모르는 일명 ‘뉴비’들이 분위기를 망친다나 뭐라나. 진지한 분위기의 곡이거나,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구간에는 외치지 않는 것이 매너인데 이를 무시하고 시도 때도 없이 외치는 관객이 많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현장에서 이 부분이 꽤나 거슬렸던 터라 관련 후기를 찾아보다가 재밌는 댓글을 발견했다. “잘 노는 나에 취해서 그래…”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친구들과 전 애인을 욕할 때 항상 하는 얘기도 “‘사랑꾼’인 자기 자신에게 취했다”라는 말이다. ‘로큰롤’을 즐기는 모습부터 세기의 사랑을 하는 모습까지, 본인에게 취하는 이유는 참 다양하다. 어쩌면 이들을 보는 것이 술에 취한 사람을 보는 것보다 더 ‘공감성 수치’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본인에게 취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다 큰 감명을 받으면 빨리 인스타스토리에 해당 포스터를 찍어 올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럼 그 좋던 영화가 오히려 그 순간부터 집중이 안 되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진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각자 직장에서 겪은 일을 토로하다 보면 “누가 더 힘든가” 겨루는 ‘불행 배틀’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어쩌다 배틀에서 이기게 되면 ‘바쁘다 바빠 현대 사회’에 힘들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나 자신이 묘하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무심코 드는데, 그럴 때마다 황급히 정신을 차리게 된다. 이런 상황을 겪다 보면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진짜 감정’인지 ‘가짜 감정’인지 점점 헷갈린다. 배우 박보영이 유튜브 채널 ‘차쥐뿔 (차린 건 쥐뿔도 없지만)’에 나와 배우들의 직업병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다가도 갑자기 거울을 보며 표정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배우들이야 본인의 감정을 객관적 시선으로 보는 게 직업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쳐도, 일반인인 나는 ‘가짜 감정’을 눈치채면 ‘현실 자각 타임’만 올 뿐이다.
‘가짜 감정’ 속 ‘진짜 감정’을 찾기 위해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조언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감정의 진품 여부를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건 내가 아니라 남이다. 사실 진짜 감정을 느끼는 건지, 그 감정에 몰두한 본인에게 취한 건지 판단할 명확한 기준이 없다. 당사자조차 ‘진짜 감정’과 ‘가짜 감정’이 헷갈리기 때문이다. “취했다”라는 같은 동사를 쓰고 있는 술에 대입해 생각해 보니, 조금은 알 것 같다. 내가 술에 취했는지 안 취했는지는 남이 봐야 알 수 있지 않은가. 나는 하나도 안 취했는데 친구들은 황급히 집에 보내려고 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친구들이 옳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만약 다 같이 취하게 되면 그 무리에 자제시킬 사람이 없어 문제인 점도 비슷하다.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게 되고, 앞서 말한 페스티벌의 그들처럼 SNS 상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술에 취하는 과정을 3단계로 나눠 보자. 1단계, 나른해지고 기분이 들뜬다. 2단계, 수다스러워지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이때 장소가 주점일 경우 용납 가능하지만, 카페 등 공공장소일 경우 주정꾼으로 취급될 수 있다. 3단계, 넘어지고 구토를 하는 등 제 몸을 가누지 못한다. 최악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서 경찰서에 가게 된다. 술에 취해도 1단계에서 바로 3단계로 가지 않는다. 스스로 자제하며 적당히 취한다면야 보는 이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술과 마찬가지로 나 자신에게 취하는 행위도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면, 1단계 혹은 2단계까지는 좋게 봐 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관객들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라이브 음악을 듣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로운 내 모습에 취한 듯한 일명 ‘킹 받는 표정’을 지어도 눈감아줬으면 좋겠다. 어느덧 자기 객관화가 미덕이 된 세상에서 가끔은 흘러넘치는 자의식에 취해보고 싶단 말이다.
#일상비평 #나르시시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