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뇌' 장착하고 출근하기
“ㅇㅇ이는 X 세대 같다더라” 전날 부서장 모임에 다녀온 부장님이 건넨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퇴근하면 불닭볶음면에 콘치즈를 넣어 먹고, 슬라임 만지면서 아이돌 영상을 보는 제가 X 세대요? 어찌 된 일인가 물어보니 회식 자리에서 각 부서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는 요즘 MZ 세대 같지 않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한 것이다. 어이가 없지만 “하. 하. 하. 하. 하” 하고 ‘진동벨 웃음’을 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현재 근무하는 곳은 경기도에 본사를 두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여러 개의 지점을 두고 있는 기 업이라 자칫 밉보이기라도 하면 ‘발령’이라는 엄중한 처벌에 당할 수 있다. 그나마 직무 특성상 서버실이 본사에 있다는 명분으로 조금 안심할 수 있지만, 하루아침에 대전에서 울산으로 옮겨가 는 부모님 뻘 직원을 보며 말단직원인 내가 어떻게 감히 ‘MZ’하게 굴 수 있겠는가. 임원이 통보 한 송년회 일정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넵!” 외친 후 황급히 선약이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연락을 돌린다. 미디어 속 ‘MZ’는 대체 어디 있는 건가 싶어 우울하다가도, 한 친구가 보낸 “그건 절대 안되는 일이얌..!!” MZ ‘그 잡채(그 자체)’의 답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가짜 ‘진동벨 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을 지을 수 있다. 회사 안과 밖의 내 모습이 너무도 달라 매일이 이중 첩자가 된 기분이다. ‘MZ’이기를 포기하는 건 그나마 쉬운 편에 속한다. ‘남초’ 부서에서 ‘홍일 점’(많은 남자 사이에 끼어 있는 한 사람의 여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으로 근무하는 건 한시 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 이제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뻔한 질문은 “나중에 ‘듀오’나 가입하려고 요”하고 넘기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아직 젠더 이슈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과 혐오의 대화는 애써 무시하기 힘들다.
회사 생활을 잘하려면 “뇌를 빼고” 다녀야 한다는 글을 봤다. SNS에서 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일으킨 “직장 오래 다니는 ‘꿀팁’”이다. 이제 직업은 다시 자아실현보다 생계유지 수단이 더 커진 듯 보이고, 기업이라는 단체에서 영향력을 100% 펼칠 수 있는 개인은 극 소수일 것이다. 크고 작 은 부당함을 겪는 게 어쩌면 당연한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받자 본인 손해다. 그렇다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자아를 손상시킬 바에 애초에 가져오지 않는 편이 낫다. 수 많은 뉴런으로 연결된 ‘진짜 뇌’는 자아가 괜히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출근 전 고이 모셔 둬야 한다. 자아실현은 회사 밖에서 하고, 회사 안에선 “뇌를 두고 왔다"라는 비유로 자아를 억누른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진짜 뇌’를 장착하고 나서도, 행여 퇴근할 때 버리 고 온 ‘세균’이 남아있을까 유튜브로 “뇌 청소” ASMR을 보며 머릿속 부정적인 기운을 뽑아내야 한다.
육지에 간을 두고 왔다는 토끼의 거짓말처럼 ‘직장 오래 다니는 꿀팁’도 불가능하다. 단지 부당 함을 개인이 참고 견디는 것에 불과해서 각자 한계점을 넘어가면 언젠간 터지기 마련이다. SNS에 는 해방 창구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일명 “천하제일 ‘좋소(질이 좋지 않은 중소기업을 비하하는 단어)’대회”가 종종 개최된다. 웃음으로 눈물을 닦다 가도 어느 순간 ‘현실 자각 타임’이 찾아온다, 공용 화장실이니 큰 볼일은 출근 전 해결하고 오라 했다는 ‘끝판왕 썰’까지 보고 나니, 지금 근무 하는 회사는 감사히 다녀야 하나 싶은 것이다. 며칠 전 인사 팀에 연말정산 ‘중소기업 소득세 감 면’ 관련 문의를 했다가, 우리 회사가 매출액 규모 상 ‘중견기업’에 속해 신청이 불가하다는 답변 을 받았다. 매출액이 그렇게 높으면 외근 나갈 때 교통비나 지원해달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유리 천장으로 남자 직원들 부장 달 연차에 아직 과장 신세이면서 항상 친절하게 웃어주는 직원을 보 니 나도 그저 웃으며 감사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자아를 숨기고 출근하는 게 ‘꿀팁’으로 전수 되는 사회라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나누는 지표(매출액, 자산규모 등)는 또 다른 통치체제일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노비 생활도 대감님 댁에서 하는 게 낫다지만, 노비 주제에 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난 그저 노비 보다 '진짜 뇌'를 갖고 출근하는 노동자가 되고 싶다.
#일상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