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주 <언어의 온도>를 읽고
오래된 것들에게는 저마다의 독특한 냄새가 있다. 숲에는 오래된 나무와 흙이 만들어내는 깊은 향이 있다. 낡은 책에서도 종이와 활자의 흔적이 그만의 냄새를 낸다. 나는 그 냄새를 맡기 위해 호흡을 깊이 들이마시는 걸 좋아한다. 하나 둘 셋 넷 들이마시고 잠깐 머금었다가 '후'하고 뱉어낸다. 내가 정화된 느낌이 든다.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 본문 중에서 '류시화 나무의 시'를 인용한 부분
말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 건 아닌지
- 본문 중에서
숲을 거닐다 보면 많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아니 마음이 복잡하고 힘들어 숲을 찾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까운 이들에게 쏟아냈던 서툰 언어들... 특히 가족들에게 쏟아냈던 말과 감정들에 얼굴이 붉어진다. 내 언어의 온도가 상대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도 무섭지만 깊은 마음의 온도를 차가운 얼음팩이 묶여 전달될 때 상대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당연하다. 서운하고 오해가 생긴다. 의도는 있었지만 상대가 상처를 받았다면 순전히 내 잘못이다. 있는 그대로의 온도로 전달하는 것이 언제나 미숙하고 어렵다.
나는 숲에서 멈춰 서서 한 문장을 곱씹는 일을 좋아한다. 그 순간은 책상 앞에서조차 얻기 힘든 깨달음을 안겨준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 본문 중에서
'측은지심'... 어느 순간 내게 이 마음이 많아진 걸 깨닫는다. 많이 아파봐서일까? 내가 아픈 것도 힘들고 남이 아픈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도 힘들다. 숲에서 긴 한숨으로 보내버리려 한다.
책 속 문장은 머리로 이해할 때보다 몸으로 체험할 때 깊어진다.
길을 잃어봐야 자신만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 본문 중에서
갑작스레 우울증이 찾아왔다. 길을 잃은 것이다. 무얼 해야 할지 몰랐고 넋 놓고 울기를 자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다시 지도를 그리고 있다. 글이 내 삶에서 단순한 텍스트를 넘어 삶의 언어가 된 것이다.
때로는 숲이 책을 대신 읽어주는 것 같다. 나무 사이로 스치는 바람은 쉼표 같고 풀벌레 소리는 작은 각주 같다. 숲은 마치 책장을 대신 넘겨주는 듯하다.
인생.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 본문 중에서
바람에 흔들린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순간 오래전에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본문 중에서
너로 시작되어 나를 알게 되는 사랑은 어렵고도 아프다. 사랑은 삶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고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묘한 에너지를 가진다. 한참 뜨거운 사랑을 하던 시절의 나는 참으로 용감하고 무모했다. 지금의 편안함으로 마무리하기까지 참으로 고되게 아팠던 기억이 난다.
우리 삶에는 반드시 비워야 할 공간이 있다.
책에서 만난 문장이 숲에서 다시 살아나고 숲에서 얻은 깨달음이 다시 글로 돌아온다. 그렇게 언어와 자연이 겹쳐질 때 나는 비로소 내 삶을 조금 더 온전히 바라보게 된다.
틈은 중요하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건지 모르겠다.
- 본문 중에서
책과 숲은 따로 존재하지만 내 안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언젠가 그것이 또 다른 글의 씨앗이 되듯 숲에서 만난 문장은 나를 다시 글로 이끈다.
사람의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리를 가고도 남는다.
- 본문 중에서
<언어의 온도>는 언어에 담긴 진심과 따뜻함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지를 아주 정돈되고 따뜻한 언어들로 나타내고 있다.
각자의 언어에는 각자의 온도가 있다. 말을 건네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언어가 따뜻해지기도 차가워지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내가 선택한 언어들에 대해 많이 고민하게 되었다. 생각 없이 뱉은 말들로 실수하기보단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언어를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다.
숲에서 만나는 문장들은 숲의 풍경 속에서 비로소 나의 언어가 된다.
문장이 내 마음에 머물고 숲이 그 문장을 살아 있는 그림으로 그려주는 것이다.
숲길은 언제나 나를 책으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