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한 그루, 한 권의 책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by 고 온

오래된 숲일수록 그 속에 들어가면 신비롭고 장엄하다. 크게 자라 나를 압도하는 나무들과 바닥에 자란 이름 모를 야생화와 새들의 속삭임까지.

숲길을 걷다가 오래된 나무 앞에 멈춰 선다. 시선이 천천히 아래에서 그 위까지 훑어 올라간다. 가지는 무수히 많이 뻗어 나갔고 껍질은 군데군데 벗겨져 있다.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나무는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서 고생스럽게 버텨냈다. 오래된 나무는 그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수십 년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나무는 언제나 내 마음을 파고드는 최고의 설교자다. 나무들이 크고 작은 숲에서 종족이나 가족을 이루어 사는 것을 보면 나는 경배심이 든다. 그들이 홀로 서 있으면 더 큰 경배심이 생긴다. 그들은 고독한 사람들 같다. 어떤 약점 때문에 슬그머니 도망친 은둔자가 아니라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스스로를 고립시킨 위대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우듬지에서는 세계가 속삭이고 뿌리는 무한성에 들어가 있다. 다만 그들은 거기 빠져들어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을 실현하는 일, 즉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 내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쓴다. 강하고 아름다운 나무보다 더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것은 없다.
- 본문 중에서

헤르만 헤세는 나무는 오직 한 가지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생존법칙인 자신을 키우는 일, 즉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을 쓴다고 했다. 생존하는 것... 그 자리에 홀로 서서 무한히 뿌리를 뻗게 하고 자신의 형태를 더 만들어 내는 나무는 위대하다고 찬양하고 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 본연의 일이 무엇일까? 나무처럼 나를 생존하게 하고 나를 표현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이면 충분할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홀로 서 있어도 살아 있으니 다 위대한 것일까? 나무에 빗댄 내 모습은 비틀려 있고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져 있지만 여전히 나는 살아 있고 나를 성장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이면 내 본연의 일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 느끼니 안도되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책과 나무는 모두 시간을 품고 있다. 나이테가 해마다의 생을 기록하듯 문장은 저자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한그루 나무는 말한다. 내 안에는 핵심이 있어 불꽃이, 생각이 감추어져 있지. 나는 영원한 생명의 생명이다.(중략)... 한그루 나무는 말한다. 나의 힘은 믿음이다.
- 본문 중에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나를 의심했다. 나무의 힘은 믿음이라니, 이 간단한 문장에 아차 싶었다. 나무는 자신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믿는다. 나무 자신이 모든 생명의 생명임을 믿는다.

내 안에 있는 열정과 생각들을 격려하고 그 모든 것들을 믿는 것. 나무가 하듯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 의심하지 말고...



나의 어린 너도밤나무가 얼마나 끈질기게 잎사귀를 붙잡고 있는지 그 모습은 늘 기쁨과 감명을 안겨주었다. 모든 나무가 잎사귀를 떨구고 앙상해진 지 오래인데 너도밤 나무는 12월, 1월, 2월 내내 여전히 시든 잎사귀 옷을 입고 서 있다. 폭풍이 나무를 흔들고 눈이 그 위로 내렸다가 다 시 녹아 흘려내려도, 마른 잎사귀들이 처음에는 진갈색이 다가 차츰 밝은 색이 되어도, 또 점점 얇아지고 매끄럽게 되어도 나무는 잎사귀들을 떨구지 않는다. 잎사귀는 어린 봉오리들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다 봄날 언젠가, 매번 예상보다도 더 늦게 나무는 갑자기 변해 있곤 했다. 낡은 잎을 잃어버리고 대신 촉촉하게 싹이 나온 연한 새 봉오리 들로 덮여 있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어린 너도밤나무가 겨울을 나는 모습이 참 감탄스럽다. 끈질기게 지난 잎사귀를 붙잡고 있어야 새로 날 어린 봉오리들을 보호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낡은 잎을 보내고 새로운 봉오리들로 나무를 덮을 수 있다. 이 모든 진리를 나무에서 구할 수 있다니... 헤르만 헤세의 시각이 참으로 예민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잎사귀가 없다. 거의 중도에 놓아버렸다. 오늘도 나는 어린 너도밤나무에게 배운다.




땅속 뿌리들이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얽혀 서로를 지탱하듯, 책과 책도 사람과 사람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글이 내 마음을 지탱해 주고 또 내가 남긴 글이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슬픔 속에 삶을 더는 잘 견딜 수 없을 때 한그루 나무는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조용히 해봐! 조용히 하렴! 나를 봐봐! 삶은 쉽지 않단다. 하지만 어렵지도 않아. 그런 건 다 애들 생각이야. 네 안에 깃든 신이 말하게 해 봐. 그럼 그런 애들 같은 생각은 침묵할 거야. 넌 너의 길이 어머니와 고향에서 너를 멀리 데려간다고 두려워하지. 하지만 모든 발걸음 모두 하루가 너를 어머니에게 도로 데려간단다. 고향은 이곳이나 저곳이 아니야. 고향은 어떤 곳도 아닌 네 안에 깃들어 있어.
- 본문 중에서




한 그루의 나무가 온 숲을 이루듯, 한 권의 책이 내 삶을 흔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한 그루의 나무처럼 대하고 싶다. 소중히, 오래, 천천히.

우리가 자신의 철없는 생각을 두려워하는 저녁때면 나무는 속삭인다. 나무는 우리보다 오랜 삶을 지녔기에 긴 호흡으로 평온하게 긴 생각을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동안에도 나무는 우리보다 더 지혜롭다. 하지만 우리가 나무의 말을 듣는 법을 배우고 나면, 우리 사유의 짦음과 빠름과 아이 같은 서두름은 비할 바 없는 기쁨이 된다. 나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는 나무가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 말고 다른 무엇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 본문 중에서



나와 내 어린 시절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내 고향은 이제 더는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지나 간 시절의 사랑스러움과 어리석음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나는 도시를 떠나 어른의 삶을 견뎌야 했는데, 삶의 첫 그림자들이 이 며칠간 나를 훑고 지나갔다.

- 본문 중에서

어린 시절에 놀던 숲이 예전의 모습을 잃고 뿌리 뽑히고 파헤쳐진 모습을 보고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 모두는 어른의 삶을 살고 있다 아니 견디고 있다. 그 모습은 어린 시절과 다르다. 관용적인 눈빛도 여유도 이해도 없다. 그저 내가 어른으로써 그 몫을 다하기만을 기대한다. 서글프게도...




헤르만 헤세는 나무를 “언제나 진실한 존재”라 했다. 나무는 가식도 위장도 하지 않는다. 있는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햇살과 비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 단순한 방식으로 살아가면서도 나무는 누구보다 위대한 존재가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한 권의 책이 내 앞에 놓여 있으면 그 속에는 저자의 삶과 시간이 고스란히 쌓여 있다.

지금까지 내 삶의 본래 목적을 향해가며 겪은 몇 안 되는 경험에 이 새로운 경험도 더해졌다. 그런 형태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러니까 비합리적이고 이상하고 꿈틀거리는 자연 형태에 몰두하다 보면, 이 형태들을 있게 한 의지력과 우리의 내면이 서로 일치한다는 느낌이 생겨난다.

- 본문 중에서




나무는 그저 자신이 자란 땅에 뿌리를 두고 비와 바람을 견디며 자신의 모양대로 살아갈 뿐이다. 인간은 종종 남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왜곡하지만 나무는 오직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가지 잘린 떡갈나무

나무야, 그들이 널 어떻게 잘라놓은 거니?
너 어찌 그리 낯설고 이상한 모양이냐!
백번이나 얼마나 아픔을 겪었기에 네 안에
반항과 의지 말고 다른 게 없단 말이냐!
난 너와 같아, 잘리면서 아픔을 겪은
목숨을 망가뜨리지 않고
시달리며 견딘 야비함에서 벗어나 매일
다시 빛을 향해 이마를 들어 올려.
내게 있는 약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세상은 죽도록 비웃었어,
하지만 내 본질은 부서지는 게 아니야,
나는 만족하고 화해하며,
백번이나 잘린 가지들에서
참을성 있게 새 잎사귀를 내놓는 거야,
그 온갖 아픔에도 나는 그대로 남아
이 미친 세상을 사랑하는 거야.

-본문 중에서

그는 고통스러운 삶의 한가운데에서도 나무 곁에 서면 위안과 자유를 느낀다고 고백한다. 나무는 말을 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 침묵 속에서 더 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 역시 힘든 시간을 겪을 때 숲을 걸으며 위로받은 적이 있다. 누군가의 말보다도 흔들리는 가지와 잎사귀의 소리가 더 따뜻하게 다가왔다. 그 경험은 책을 읽는 순간과도 겹친다. 작가의 따뜻한 문장이 내 마음을 붙잡아 주었듯 나무 또한 고요한 목소리로 내 안의 혼란을 잠재워 주곤 한다.


이 책은 결국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뿌리를 단단히 내리면서도 하늘을 향해 성장하는 것, 매년 잎을 잃으면서도 다시 꽃을 피우는 것, 그 단순한 진실 속에서 우리는 ‘지속’과 ‘회복’의 지혜를 배운다.


“너도 너만의 뿌리를 내려라. 그리고 너의 하늘을 향해 나아가라.” 나는 그 메시지를 오래 붙잡고 싶다. 책을 읽으며 만난 나무와 숲의 목소리가 앞으로의 내 삶과 글쓰기에 한결같은 지침이 되어 주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