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에 멋지게 맞서는 개인들
장류진 작가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먼저 읽었고,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다음 책으로 <피로사회>를 골랐다. 두 권 다 읽고 나니, <일의 기쁨과 슬픔>속 등장인물들이 각각 피로사회 속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개인들로 보였다. 소설책 속에도, 그리고 현실에도 다양한 개인들이 존재한다. 피로사회에서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터득하여 멋지게 맞서는 인물들도 있고 아직 서툴러서 무너지는 인물들도 있을 것이가.
책에서 배운 내용을 현실의 삶에 적용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 두 책의 내용을 내 삶에 적용하려면, '피로사회'에서 '일의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을 기반으로 끊임없는 사색과 고민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로사회>를 128쪽이라고 얕보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자그마치 3시간 가량을 이 책을 완독하는데 썼다. 철학서적을 제대로 읽어본 게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책에서 당연히 독자들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개념들을 찾아보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이 책만의 특징을 적어보자면, (1) 첫째는 저명한 학자들에 대한 비판이며, (2) 둘째는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결의 고도의 추상성이다. 저자는 그동안 푸코, 한나 아렌트, 프로이트 등의 학자들이 인간의 주권, 심리적 특성, 사회의 특성 등을 논하는데 시대착오적 실수를 범했다고 주장한다. 아직 이 학자들의 이론을 배우는 단계의 나는, 이 학자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저자의 책이 조금 낯설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시대적 변화가 있었기에 유명 학자들이 시대착오적 실수를 범했다는 것인지는, 다음 문단에서 설명하겠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으로, 저자는 (3) 피로사회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이 책의 존재가치를 사람들이 피로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자기자신을 인식하는데 둔다. 그러니 피로사회에 지쳐 위안을 얻고자 이 책을 펼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이 책을 고르고, 끝까지 완독하는 것이 저자가 의도하는 해결의 실마리이다.
긍정성의 폭력
책을 읽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은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읽었다. 저자가 과거와 현재를 규명하는 시대적 특성의 전환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질성, 타자성의 규명을 중심으로 면역학적 구도가 형성되었었다. 저자는 이를 부정적인 상태라고 본다.(저자가 말하는 부정적인 상태는 오히려 책에서는 긍정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나는 이 부정성의 뜻을 undesirable 이 아닌, 타자의 존재를 상정한다는 뜻의 부정성이라고 이해했다.) 하지만 현재는 이 구도가 소멸하고 긍정성이 과잉인 상태가 된다. 유사하게, 같은 것의 과다, 비만과 포화상태, 시스템적, 내재적 폭력을 지닌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성이 과잉인 상태는 끝없는 자기착취로 이어진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거: 이질성, 타자성, 면역학적 구도, 부정적 상태 <=> 현재: 과다함, 포화 상태, 긍정성의 과잉 상태
강제적인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
이 전환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당위와 부정성에 의해 통제받던 개인들은, 능력과 긍정성에 의해 자기착취적이 된다. 즉 사람들은 타인에 의한 강제와 규율에서는 벗어나지만, 새로운 규율인 '성과를 향한 압박'에 구속된다. 저자는 이를 완전한 자유가 아닌 강제적인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라고 말한다. 이 전환의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며, 이는 지극히 경제적인 선택이다.
과잉 주의 (hyper attention)와 사색
저자는 현대사회의 멀티태스킹을 인간 주의 구조의 퇴화라고 비판한다. 인간의 '주의력'이 과다한 상태를, 단순한 분주함의 연속이자 사색의 소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과잉 주의로 인해 사람들은 사색을 통한 사물의 경이감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현대사회의 사색의 결핍'이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저자는 하이데거와 그의 제자 한나 아렌트가 매우 중시하는 '활동적 삶'을 비판한다. 그들은 인간의 행동성이 영웅적 성격을 띈다고 말하는 행동주의자들이다(기적은 인간의 탄생과 그들의 행동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을 만큼). 하지만, 저자는 성과사회에서는 "제작과 행동을 아우르는 활동적 삶의 모든 형식은 노동의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는 근대사회의 '노동사회'적 특성으로써 (1) 개별적 개성이 포기되고 (2) 익명적 삶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끌려간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우리의 비판적인 저자는 역시 아렌트가 제시한 이 특성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동사회이자 성과사회에서 개인의 개성은 외려 포기되지 않으며, 개인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이 사회는 존재의 결핍, 덧없는 삶, 극단적 불안과 허무 그리고 자아의 개별적 고립을 특성으로 한다. 즉 '벌거벗은 삶'과 이 삶을 지속시키는 이유이자 결과인 '벌거벗은 노동'이 이 사회의 특성인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세계가 '탈 서사화'되었다고 표현한다. 게다가, 아렌트는 '행동하는 인간의 힘'을 찬양하는 학자이지만, 양면적으로 '사색적 삶'에 손을 든다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더욱 강화된다.
니체에 따르면 사색에 필요한 것은 "중단하는 본능", "잠시멈춤", "머뭇거림"이다. 우리 사회가 우유부단함으로 치부하는 생산적 활동의 공백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진정으로 행동하게 하는 '사색'의 필요조건이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같은 맥락에서 분노의 상태를 긍정한다. 왜냐하면 분노 또한 멈춤의 일종이자, 예외적 상태이며 부정성의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성과사회에서는 분노가 없다. 가속화에 방해가 되는 부정성은 모두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사색은 '보는 법'을 갖추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이 보는 법을 갖추는 것이란, "눈을 평온과 인내, '자기에게 다가오게 하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동의 주체는 오직 잠시 멈춘다는 부정적 계기를 매개로 해서만...우연의 공간 전체를 가로질러볼 수 있다." 즉, "머뭇거림을 통해 행동이 노동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저자가 말하는 긍정적 힘은 'can' 의 상태이다. 그리고 부정적 힘은 'cannot'이 아니라 'able to be cannot'이라고 할 수 있다 .'cannot'은 오히려 긍정적 힘의 과잉으로 인한 무력한 상태의 개념이 된다. 즉 긍정적 힘만 있다면, 치명적인 활동 과잉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 삶에서의 생동성은, "최대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의 경향 속에서 생명활동 정도로 환원"되고 만다.
우울사회
저자는 피로사회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우울사회를 같은 맥락에서 설명한다. 먼저, 피로사회 속 개인들의 자아는, 포스트 프로이트적 자아라고 할 수있다.
먼저, 과거의 프로이트적 자아, 즉 규율적 주체는 포스트 프로이트적 자아로의 전환을 맞게 된다. (칸트가 말하는 이중자아 (행위하는 자아와 도덕성을 기반으로 규율하는 자아)는 프로이트적 자아에 머문다)
하지만 포스트 프로이트적 자아는, 의무의 이행에서 벗어나 타자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되 나르시시즘적 자기관계를 가진 성과사회의 주체로 묘사된다. 이 자아는 타자와의 관계를 소멸시켜버리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정립이 불가능하다. (자아의 정립을 위해서는 나와 비교될 수 있는 타자가 필요하다.) 또한, 치명적이게도 이 자아는 스스로를 보상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마모시킨다.
저자는 이를 통해 우울증을 진단한다. 우울증의 특징은 무형성이다. 즉 특징 자체가 특징 없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제한없는 가능성(할 수 있다는 긍정성의 과잉) 과 통제할 수 없는 것 (타자가 상정되어 있지 않기에 자아조차도 정립될 수 없음) 사이의 충돌이다. 그렇기에 우울증에는 어떠한 유대관계도, 어떠한 지향점도, 대상도 없다. 즉 타자가 전혀 개입되지 않기에, 적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사용하게 된다.(통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종결시키는 결단력의 부재로 인해, 어떠한 결정 없이 자발적 자기착취가 일어난다.(제한없는 가능성)
이 자기 관계적 성격의 원인은 사회의 '탈 갈등화'이다. 저자는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복종적 주체에서 성과 주체로의 전환으로 설명한다. "복종적 주체가 초 자아에게 '예속'된다면, 성과 주체는 자신을 이상자아에게 '기투'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즉 복종적 주체가 겪던 강제성이, 성과주체가 겪는 자기강제 로 전환되면서 결국 'burn out'이 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자유와 강제가 통합됨으로써, 자기자신이 '주권자'이자 죽여 마땅한 사람인 '호모사케르'가 된다. 저자는 여기서 아감벤이라는 학자의 주장에 반박한다. 아감벤은 주권자와 호모사케르가 분리되어 거주하는 '폭력의 공간구조'를 이분법적으로 보지만, 저자는 성과사회의 호모사케르들(이자 주권자)은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정상상태" 속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이 전일적 공간에서는 고갈과 포섭, 그리고 순응적 합의가 일어난다.
책을 마무리하며, 저나는 니체의 강한 영혼과 평정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의 '목적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을 비판한다. 피로사회는 결국 도핑사회가 되어버리고, 니체의 말처럼 '건강을 여신화'하게 될 것이다. 이 도핑으로 얻은 생동성은 발가벗은 생명에 쓰일 것이므로, 죽어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인 것이다.
책이 많이 어려웠기에 역자 해설에 기대를 갖고 읽어보았다. 다행히 책 내용에 대한 단순 요약이 아니었다. 역자는 (1) 한국 사회 (2) 한국 현대사 를 저자가 제시한 긍정/부정 이분법 패러다임으로 분석한다. 또한, 어떻게 하면 자본주의의 착취적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에 대한 물음에, 역자는 유혹의 연속인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반성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저자는 물음의 제기까지를 책의 역할로 보고, 해결방안의 사유는 독자들에게 맡긴다.)
여전히 책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원래 프로이트의 사상을 잘 몰라서 이해가 가지않았던 부분, 그리고 인간은 부정의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 활동적 삶의 정확한 정의 등이 그것이다.
짧게나마 감상을 적어보자면, 결국 현 시대의 자본주의와 평등주의가 각각 양산하는 인간 소외와 개인주의가 피로사회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현상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그 어떤 사실적 해석보다 깊이 있고 적용점이 방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철학 공부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 속 8개 단편들은, 각각의 메세지가 일관적이면서도 뚜렷하다. 각 이야기를 읽고 마지막 페이지에 감상을 짧게 메모해두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감명깊게 읽었던 단편 몇 가지를 간단하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소설 <잘 살겠습니다>는, 회사 내 여성에 대한 암묵적인 차별을 소재로 하여 순진무구한 직장인 여성 '빛나'와 전략적으로 현실 대응 방식을 내재화한 '나'의 대비와 연대를 다룬다.
두 번째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는 회사 내 갑질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전략적인 등장인물과 자신의 취미인 클래식으로 워라밸을 균형있게 유지하는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에게 일의 기쁨은 성취감일 것이며, 이 기쁨에는 감정적 소모와 자기 착취가 전제되어있다는 점에서 역시 일의 슬픔이 수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소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보고 싶은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핍된 사고인지에 대해 경각심을 준다. 해설에 따르면, 저자는 "자의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족적인 해석 방식"은 결국 여성을 대상화하는 방식임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네 번째 소설 <다소 낮음>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이야기다. 가난한 인디뮤지션인 주인공은,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이나 신념을 돈과 맞바꾸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한다. 또한 끊임없이 사회로부터 (자신에게 갑인 소속사 사장,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상황을 공유하는 아내 '유미') 자신의 '효율성'을 재단받아야 한다. 피로사회에서 자기착취가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임에도, 주인공은 끝까지 자기 착취를 거부하며 맞서보려고 발버둥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효율성을 포기한 대가는 너무도 컸다. 자기 자신을 붙들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자존심이라는 감정을 모두 버려야 했다. 나는 이 효율우선주의 사회의 대안을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기회가 된다면 관련 책을 리뷰하도록 하겠다.
마지막 소설 <탐페레 공항>도 정말 좋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대학 졸업과 진학의 과정에서 일상적인 사투를 벌이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았다. 여행을 가는 이유는, 여행을 다녀온 기억으로 그 후의 일상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설 속 여행지는 핀란드이다. 백야나 오로나 가 있는 낯선 곳. 취업 현실 따위와는 동떨어진 곳. 그런 곳에서의 기억을 그녀는 소중하게 다루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에 타협하는 것을 쉽게 정당화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이 이상과 현실의 균형감각을 유지한 것이라는 칭찬을 들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인아영 평론가의 해설을 읽어보면, 소설 속 "작고 평범한 개인들"은, "노동과 일상의 경계를 명민하게 알고, 일의 기쁨과 슬픔을 조화롭게 이해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의 복잡한 그물망 안에서" 살아간다.
<일의 기쁨과 슬픔> 속 주인공들은, 피로사회에 맞서지도, 그저 순응하지도 않는 균형감각을 지닌 현시대의 초상들이다. 이것이 비정상적 사회에 대한 개인들의 대응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개인들이 그럴 듯 하게, 평범하게 이 사회를 겪어나간다고 해서, 이 병폐를 유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읽는 책들 대부분의 결론이 그렇듯,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담론은 아주 점진적으로 가능한 부분부터 조금씩 뜯어고쳐져야 한다. 한병철 교수는 철학으로, 장류진 작가는 소설로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동원하여 이 병폐를 고치는 일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