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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소시 Mar 21. 2024

행복해도 되냐고 물어온 그녀..

그녀가 물었다.

"이런 내가 행복해도 될까요?"


영어 교실에서 만난 그녀는 따로 노트를 만들어 수업 전에 미리 예습한 내용을 정리해 오고, 수업 중에도 제일 열심히 대답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나라마다 특유의 악센트가 있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모범생이었다.


그녀와 짝꿍이 되었을 때 열심히 예습해 온 노트를 보고 놀라, 엄지를 들어 보여주며 "좋은 학생"이라고 칭찬해 줬더니 아이마냥 좋아라 했었다. 질문을 주고받다 그녀 역시 세 아이의 엄마란 걸 알게 됐을 .. 우린 무려 아이를 지켜야 하니 특별히 더 튼튼한 슈퍼맘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해 주며 활짝 웃어주던 그녀였다.


아이가 하나라고 육아가 쉬울까만은..

아이 셋 육아의 어려움과 고단함은 그냥 세 배쯤의 어려움이 아니었다. 같은 어려움을 경험해 본 동지애 같은 걸까..  이상하게도 누가 세 아이 맘이라도 하면 알 수 없는 내적 동질감이 솟아오르면서 괜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수업을 마칠 때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녀가 유모차에 태운 막내와 같이 돌아왔을 때, 문득 십여 년 전의  모습이 보여  친밀감은 수직상승했다.  


그녀는 이 수업을 오기 위해 갓 두 돌이 지난 막내를 데리고 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와서 영어 수업시간 동안 돌봐주는 돌봄 교실에 맡기고, 열심히 수업하다가 끝나는 시간이면 아이를 데리러 서둘러 달려가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지난날의 나를 본 거였다.

셋째를 낳고 터울 많은 세 아이를 타지에서 독박육아하며 키우느라 십여 년 넘게 통잠은 자보지도 못했고 지칠 대로 지쳐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은 그렇게 힘든데.. 내 이름보다는 누구의 엄마로 불리며 그렇게 십여 년을 살다 보니..

'나는 누구인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뭘 할 때 즐거웠는지.. ' 

그렇게 나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많아졌었다.


누구의 엄마이기 이전에 내 이름으로 다시 불리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게 들어서.. 막내가 세 돌이 지나 어린이집에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다시 배우고 싶은 걸 찾아다니며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은 혹독했다. 독박육아하면서 세 아이 돌보며, 배우고 싶은 걸 다시 공부하려니 시간을 분, 초 단위로 쪼개며 살아야 했다. 그래도 무언가를 다시 꿈꾸고 배울 수 있어 고단했지만 힘들기보다 성장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한 번은 꼭 배우고 싶은 강좌가 도서관에서 개설되는데 하필 저녁 시간이었다. 남편이 퇴근해서 아이들을 봐줄 수 있다면 참 좋았겠지만, 퇴근이 늦는 편이고 출퇴근 거리가 멀어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때도 남편 발령 따라 우리만 타지에서 살고 있었기에 아이들을 부탁할 친척도 없었고 포기해야 하나 싶던 그때.. 고맙게도 도서관에서 아이들을 위해 놀이방을 오픈해 주겠다고 하셨다. 돌봐주는 사람은 없지만 수업하는 바로 옆 교실에 아이들이 놀 수 있게 안전매트를 깔아 주겠다고..


돌아보면 참 미안한 일인데..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첫째에게 수업할 동안 동생들과 같이 놀아달라고 부탁했다.

(첫째도 아이였는데.. 게다가 어린 동생을 두 명이나.. 너무한 엄마였다. )

책과 장난감, 간단한 간식을 잔뜩 챙겨가서 아이들이 놀 수 있게 준비해 두고 바로 옆 교실에서 수업하면서도, 실상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업 내내 옆 교실에서 나는 소리에 더 집중하며 그렇게 공부하러 다녔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아이들에게 미안해서.. 수업 중 들었던 재미있고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불편하고 어려운 시간을 견뎌준 아이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었다. 미안하면서도 배우는 즐거움이 더 컸던 시간이었다.


그랬었기에.. 어린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영어 수업 오는 그녀의 모습에서 지난날의 내가 보였나 보다.

그렇게 열심인 그녀가 너무 보기 좋았다. 육아로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자기 계발하는 그녀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러던 어느 날..

가끔 아이들이 아플 때나 결석하던 그녀가 2주간 본인 건강 문제로 수업에 오지 못한다는 글이 단톡방에 올라와 었다.


돌봐야 하는 어린아이들이 셋인데.. 어디가 많이 아픈 걸까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얼마나 아픈지 모르지만 얼른 회복하길 바란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놀라운 답장이 왔다.


고향에서 머나먼 타지에서 살고 있기에, 어려운 순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던 걸까..

그녀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임신을 했는데 세 아이 돌보는 것도 힘들어서 안타깝지만 수술을 할 거라고.. 그래서 마음이 많이 아프다고.. 그녀가 보내온 메세지 속 수술이 어떤 수술인지 단어를 몰라도.. 뭘 의미하는지 알 거 같았다.


이렇게 속 깊은 이야기를 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힘든 이야기를 들려준 그녀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하나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저 세 아이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나 역시 세 아이 맘이라 얼마나 어려운 결정일지 그 마음 헤아릴 수 있다고 위로했다. 두 번의 자연 유산으로 그 수술을 해 봐서 아는데 출산만큼이나 몸이 많이 상하는 일이니.. 잘 쉬어야 한다고..


순간 유모차를 타고 오던 어린 막내가 눈에 밟혀.. 혹시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괜찮다 말하면서도 지금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작은 위로에도 고마워했다.


그렇게 2주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음 수업에 그녀가 올지.. 온다면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지 고민이 됐다. 어쩌다 어려운 상황을 말했을 텐데.. 크게 떠벌릴 일은 아닌 거 같고.. 마음은 미역국이라도 조금 끓여다 주고 싶었는데 나라마다 이럴 때 어떤 걸 먹는지 모르기에 너무 오버인 거 같았다.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나 싶어 고민하다 작은 초콜릿 한 상자를 챙겼다. 슬플 때 초콜릿 같이 달콤한 걸 먹으면 기분 전환이 되기도 하니.. 잠시라도 달콤한 간 가지면서 회복에  도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혹 시간이 된다면 뭐라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해서 위로해 주면 되겠지 싶었다.


그렇게 2주 만에 업 시간에 다시 만난 그녀..  

평소처럼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어서 눈 한번 맞추기 어려웠지만 얼굴이 많이 창백해 보였다. 쌩쌩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저렇게 쐬면 안 되는데 싶어 자꾸만 눈길이 갔다.

 

수업이 끝나갈 즈음.. 평소처럼 아이를 데리러 가느라 먼저 일어나는 그녀 뒤로 선생님이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하셨다. 그녀가 곧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고..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었다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스러워서 급하게 그녀를 따라 나갔다. 초콜릿 상자를 손에 들고..

몸은 좀 어떠냐는 내 질문에 힘없는 얼굴로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던 그녀..

"괜찮다면.. 한번 안아줘도 될까요? "

창백한 얼굴이 너무 아파 보여서 한번 안아주고 싶었다.


벌려 안아줬더니.. 내 품에서 엉엉 울음을 터트려버린 그녀..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려왔다. 같이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미역국을 준비해 올걸.. 안타까웠다.


아직 무리하면 안 좋을 거 같아 집에 가는 걸  돕고 싶다고 했더니.. 버스 타면 금방이라며 애써 웃음 지어 보이며 뒤돌아서던 그녀..


많이 힘들었던 걸까.. 하필 시기가 돌아가는 때와 맞아떨어진 걸까..

그녀에게 싱가포르에서의 시간이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될까 봐 괜스레 더 마음이 쓰였다.


이런 이별은 또 처음이라..

그냥 이렇게 떠나보내는 게 안타까워 차 한잔 할 수 있냐고 메세지를 보냈더니.. 바로 다음 주 출발이라 시간 내기 어렵다고 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이삿짐을 싸고 본국으로 짐도 이미 부쳤단다.


타지에서 만난 이들이라 본국으로 돌아가며 아쉬운 이별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이렇게 마음 아픈 이별은 처음이라 안타까웠다.

부디 건강하고 고향에서 세 아이들과 행복하길 바란다는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 이런 내가 행복해도 될까요?"

그녀가 물었다.. 왈칵 눈물이 솟아올랐다.

그러고 싶다고.. 꼭 세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다며 고맙단 작별인사를 보내온 그녀..


세 아이 지키려면 우린 더더 강한 엄마여야 한다고 했었던 첫 만남 때의 말처럼 힘내길.. 가족들이 있는 고향에서 몸도 마음도 잘 회복하길 바라보며..




(Photo by Harry Cunningham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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