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문학에 대한 몇 년 간의 질문 끝에서
아주 오래전 일이다.
누군가 요새 독서 뭐 하냐고 물었고
나는 요새 하루키를 읽는다고 했다.
그 작품들의 주제가 뭐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
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나한테 책 제대로 읽는 거 맞냐고
핀잔을 주었다. 난 얼굴이 붉어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난 하루키 작품들의 주제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제를 정의하기 어렵고 내용이 과도하게 복잡하더라도
그 복잡함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너무나도
선명하고 매력적이다.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가 뭐냐고 묻는다면
한 개인이 현실과 자신만의 세상(관념)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 것이 몇 년 동안 문득문득 하루키의 작품들에 대해 떠올리면서
내 나름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메타포가 넘쳐난다는 점은
다들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점과 더불어 넘쳐나는 메타포의
모호함과는 반대로 주인공의 현실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냈다.
주인공의 감정과 감각, 주인공이 먹고 마시는 것 행동하는 것 등등.
이 상반되는 주인공의 현실과 추상적 관념 속에서
작가의 손을 잡고 소설이라는 숲 속으로 산책을 떠났다.
산책의 과정이 너무나도 매혹적이기에 홀린 듯이
그 산책의 끝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즐거운 여정의 끝에서
그래서 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를 생각하는 순간
난 아무것도 정의할 수 없었다. 그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
작가의 손을 놓은 채 숲에 들어가자마자 미로에 빠졌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하루키의 어떤 소설 속에 나왔던 한 대목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풀 밭 어딘가의 깊은 우물에 빠진 것 만 같았다.
여기서 난 작품보다는 작가 본인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루키 정도의 대작가가 굳이 왜 이렇게 소설을 구성했을까?
주인공의 선명하고 확고한 현실과 대비되는 불확실하고
필요 이상으로 넘쳐나는 메타포는 아름답지만 동시에 혼란을 준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하는 주제라는 부분을
독자와는 필요 이상으로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도대체 왜 그럴까?
이제는 일본의 사회의 한 모습을 생각했다.
일본은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회다.
어떠한 사고 등에 대해서 굳이 다른 나라의 사고를 가져와서
설명하는 것을 보고 굉장한 위화감을 느꼈다.
냄새나는 물건에 뚜껑을 덮는다라는 일본 속담이
이런 성향을 잘 드러낸다.
동시에 이런 부분과 더불어 와(和)라는 문화가 있다.
일본 특유의 조화와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를 통해
사회의 평안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특징이다. 이는 일본의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사회의 평안이나 질서를 깨뜨리는 것에 대한 굉장한 거부감과
더불어 그 사람을 제재를 가하거나 배제해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루키와 일본 사회의 단면을 엮어보자.
하루키의 소설 속에선 일본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부분은 항상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하루키 식 주인공이라 붙여도 될 정도로 특징이 있지만
자기 자신만의 세계관 혹은 관념적인 부분을 갖고 있다.
현실의 하루키와 앞에 말한 일본의 사회의 한 모습이 부딪힌다.
(세계에서 자신의 작품성을 인정받기 위해 과거 일본이 하지도 않은 짓을
사실인양 적는 소설가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비난을 계속 듣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역사적 일본의 오점을 소설에서 거론)
그리고 작가가 마주한 현실처럼 작품 속 주인공의 관념적 세계관과
작품 내 부조리함 혹은 공포스러운 무엇인가가 부딪히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기에 이렇게 모호하게 적고 있는 것 아닐까.
하루키 본인은 일본의 역사적 오점이나 과오에 대해서 직시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일본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일본 사회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동시에 그는 다테 마네(겉마음), 혼네(속마음)의 일본의 표현방식으로
일본의 사회와 독자들에게 최대한 불편하지 않게 불편한 주제를 조금씩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이 간극들 사이에서 하루키는 소설 속 현실과 메타포를 사이를 넘나들며
복잡하고 매혹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있다고.
어쩌면 이러한 모순이나 상황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소설가라고.
혹자는 말한다. 일본 작가들은 역사적 부채감과 죄책감을 기묘한 판타지나
관념으로 도피하여 면죄부를 얻으려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모두가 오에 겐자부로가 될 수 없고 다 미시마
유키오처럼 되지 않는다고.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이 자신만의 공간과 사회의 공간 사이에서 방황했듯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그 간극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하루키는 그 간극 속에서 한 개인이 현실과 자신만의 세상(관념)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누군가는 이를 비겁하다고 치부하겠지만 타인의 삶의 모습과 방황에 대해
비겁하다고 단정 짓는 건 지독히 오만한 행동이다. 우리는 무대 위에 비치는
타인의 모습을 우리만의 시선으로 볼뿐 무대 뒤의 타인을 볼 순 없다.
그 무대 뒤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한 문학가는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