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전설

05년도의 나의 질문과 26년도의 나의 대답

by yun

5년도의 대학생인 내가 본 피아니스트의 전설

이게 진짜 천재라는 인물의 이야기인가? 는 의문과 의심


이 작품은 굉장히 오래된 작품이다.

개봉 당시 단순한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로

소개된 측면이 있었고 호평의 수준까진 아니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본 시기는 대학생 시절인데 이

영화가 매우 맘에 들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라는 평에 그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불만이 많았다.

왜냐하면 당시 이러한 평을 보고 영화를 봤는데

이 영화의 처음 부분에서 이건 결코 단순한 천재의

이야기 따위가 아님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내레이션과 함께 미국이다

소리치는 장면에서 유럽이라는 패권이 무너지고

미국으로 패권으로 이동하는 은유가 아니었을까?

이들에 연기에서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이나 열망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그 외침과 자유의 여신상이 나오고 이를 돌아보는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이어지는 환호에서 주인공도

아닌 이들에게 이렇게 긴 시간 씬에 잡아주는 이유는

감독의 의도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을

통해 이젠 유럽인이라도 유럽만이 아닌 다른 대륙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도기적인 혹은 혼란의 시대라는

부분처럼 보이는 것도 내 착각일까?


전쟁이 끝난 후의 노래의 취향이 달라졌다는 것과

맥스의 트럼펫은 이제 실사용이 아닌 기념품정도로

취급된다는 악기점 주인의 대사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트럼펫이 고작 20달러 정도밖에 안

나가냐고 하는 장면도 그냥 넣은 부분일까? 후에 이 남자가

팔아버린 트럼펫을 마지막으로 불게 해달라고 하고 가게

주인이 이를 허락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이 남긴 레코드와의 접점을 넣기 위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난 이 대화들이 절대로 단순히 나온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유럽과 미국으로 오가는 배에 남겨진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1900년 1월 1일에 1900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주인공은

무엇인가? 배에서만 살아갔으며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인물,

유럽의 고전적인 음악과 당대 미국의 최신인 재즈를 배우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레 구사한 인물이 단지 천재성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이러한 의문점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단순한 천재의

영화로 소모되어서는 안 되었다. 대학생 때 영화를 30분 정도 보고

든 생각이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무엇이고 왜 배에서만 연주하는가? 재즈의

대부라는 사람과의 승부는 단순한 천재성의 과시인가?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을 기억하는 맥스 투니가 악기점 주인에게서

자신의 분신인 트럼펫을 돌려받는 장면에서 당시의 나는 설명하지

못할 환희를 느꼈다. 이 감정은 무엇인가?


26년도의 4조 2교대 보안인 내가 보는 05년도의 질문에 대한 답

05년도의 질문은 정당했고 이에 대한 의미를 풀어보는 시간


그때는 그저 그런 감각에 가까웠고 20년이 지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그저 과소평가되어서

이제야 재평가받고 있다고.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러한 특성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당시

시대의 혼란기와 과도기를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메타포이다. 그는

집도 없고 가족도 없고 국적도 없다. 오직 배 안에서 데니 부드맨

T.D 레몬 나인틴헌드레드라고 불리며 연주를 했을 뿐 그가

존재했다는 그 어떠한 공식적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음악적으로도

자연스레 과거의 기교와 미국의 최신의 재즈를 동시에 구사했다는 점

또한 음악에서마저 그는 경계인이라는 설정이다.

이 영화는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하며 동시에 주인공의 의미를 이해해야

완성된다. 둘 중 하나라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가 한국에 처음 나왔을 당시에는

그저 천재의 이야기로서 소모되어 버린 점 아닐까? 혹은 대중들이

이러한 이해를 두고 영화를 시청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라도

있던 것일까?


나의 이러한 생각에 의미를 더해보자. 재즈의 대가와의 피아노 승부는

단연 영화의 하이라이트이고 천재성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1900이 가진 영혼과 낭만이 발휘되는 바다(순수의 공간)

위에서 시대의 변화를 이겨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은 사라져 가는 시대의 마지막 불꽃의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더 풀어보자면 재즈의 대부인 젤리 롤 모턴은 자기 과시와 승리를 위해

음악을 도구로서 이용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음악에도

아름다움이 있었고 1900은 이에 감명을 받아 그의 음악을 따라 연주한

것이다. 하지만 젤리 롤 모턴이 음악을 승부와 과시욕의 도구로 사용했을

때, 그는 격분하여 자신의 영혼을 담아 낭만의 심판을 내린 것이다.

이는 음악을 부와 승리, 성공의 척도로서 사용하는 육지와 시대의 변화 VS

음악을 세상과의 소통이자 영혼의 표현이라는 사라져 가는 낭만의 마지막 불꽃

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1900과 한 농부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바다의 목소리와 농부의

딸로 추정되는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는 장면이 있다.

한 농부와의 대화에서 삶이 힘들 때 그의 인생에서 처음 본 바다는 인생은

무한하다고 외쳤으며 그 무한함을 긍정하며 다른 삶을 살려고 시도한다.

농부에게 있어서 처음 본 바다의 광활함의 무한은 희망과 새로운 삶의

동력이 되었다. 이는 배 안에서만 삶을 영위해 나간 1900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더하여 자신이 영혼이 담긴 레코드를 계약까지 취소하면서까지 사랑을 느낀

그녀에게 주려고 하지만(그만의 고백방식), 그녀는 육지에서 정착을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의 음악과 고백은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하여 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여 그녀에게 주려고 한

레코드를 부순 것은 이뤄질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이(순수성) 변질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길 바란 행동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레코드는 투니의 변덕으로 피아노에 숨겨졌고 그 피아노를 인수한 악기점

가게 주인에게 전해짐으로써 그가 투니의 이야기를 믿게 되는 장치로서 그리고

1900이 남긴 유일한 음악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이런 부녀와의 만남 한참 후에 그는 육지로 내려가려는 시도를 하려 한다. 하지만

그가 끝없이 펼쳐진 도시에서 본 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한이었다. 농부의

무한에 대한 희망과 동력과는 대조로 무한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결국 그는 자신이

배에서 내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지하게 된다.


주인공이 언급하는 88개의 건반에는 그의 영혼이 담겨있다. 이 영혼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바다 위에서만 음악으로 나올 수 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면

그는 피아노를 치지 않는다) 그가 배에서 내리기로 했을 때 끝없는 도시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건반을 보았고 그 속에서는 자신의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배에서 내리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배와 함께한

그의 최후도 음악과 영혼에 대한 낭만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는 시대의 혼란기와

과도기를 받아들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인이라는 메타포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개인으로서 파멸하지만 이러한 시대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는 마치 최인훈의 광장에서 남과 북이라는 사회에선 살 수 없고

모든 것을 잃은 청년이 새로운 살 곳이 아니라 바다로 뛰어내린 것과 같은

선택이 아닐까? (갑자기 수험 공부 때 배운 부챗살이 좁아지고 어쩌고 하면서

이명준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부분마저 떠오르려고 한다)

실존적 증명으로서 나인틴 헌드레드와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같은 선택을

한 것이라 말하겠다.


이 영화는 당시 급격한 시대의 변화상 속에서 그 어디도 속해있지 않은 이방인

1900의 음악을 통해 사라져 가는 시대의 낭만이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름다운 조사(弔詞)이자 헌사(獻詞)이며, 사라져 간 것을 기억하는 자들의

이야기(맥스 투니와 악기점 주인)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주인공은 왜?를 싫어하는 자이고 이런 시대를 버틸 수 없는 자이지만

현대는 왜?를 계속해서 달고 살아야 하는 시대이다. 이런 간극이 그가

파멸을 택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본인 역시 왜?를 계속 따져야만 하는

현대의 인간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영화에 대해 왜?를 계속 묻지 않았다면

과거에 이 영화에 대해 빠져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 대한

기억도 지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왜?를 통해 1900과 이 영화에 대해서

의미를 정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봐야 한다.


결국 감각과 의문으로 남은 이 영화를 전혀 다른 인간인 내가 20년 동안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끄집어내서라도 '이해'하고 싶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설명할 순

없어도 인상적인 것에 대해 가지는 의문을 통한 감각과 기억,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만은 시대를 넘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 어디에서도 1900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 맥스의 기억과 자신이 고친 레코드음악의

아름다움으로 맥스의 이야기를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인 악기가게 주인처럼 말이다.


현재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도 여전히

트럼펫을 팔고 간 주인공의 절친한 친구가 이야기를 통해 가게 주인과

그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마지막에 가게 주인이 그의 트럼펫을 돌려주는

부분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영화 내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고 이를

들어줄 친구가 있다면 인생은 살만하다고 했던가? 이처럼 가게주인과

맥스는 단순한 비즈니스관계에서 기억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를

통해 나인틴 헌드레드는 사라졌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그가 존재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맥스가 여전히 불우한

처지일지라도 주인공의 기억과 함께 자신의 영혼(트럼펫)을 되찾아

다시 음악을 할 것이라는 희망이 보였기 때문에 과거의 난 환희를 느낀

것이 아닐까?


현대의 피아니스트의 전설과 그 의의 -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영화가 2019년도쯤에 중국에서 상영됐는데 매우 좋은 호평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사실을 지금에야 알았지만 나는 매우 기뻤다.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뭔 다른 부분에서 더 기뻤다.

이 영화의 메시지와 더불어 25년의 시간을 넘어서 잊혀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재평가가 되어가고 누군가에게 의미를 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함을 느꼈다.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빨리 가치를 잃는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메시지와 자신들의 처지를 이입해서 이 영화에 대한 호평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이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바뀐다. 이 변화의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어간다.

몇 년 전만 해도 코딩과 프로그래밍이 대세였으며 ai에 대한 가능성으로 삶이

편해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마치 영화 처음 미국에 도착한 이주민들이 보여주는

그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재 ai에 의해 코딩과 프로그래밍의 취업문은 사실상

막혔으며 점점 여러 부분에서 시대의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인간은 이

속도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가? 우리도 이미 나인틴헌드레드이며 코딩과 ai에

희망을 품다가 막막해져 버린 사람이거나 곧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니,

1900은커녕 그의 친구이자 가난으로 자신의 영혼(트럼펫)까지 팔려고 한 맥스

투니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1900은 한때나마 자신의 음악으로 변화하는

시대를 압도했고 맥스 투니도 트럼펫 실력만으로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배에

탄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도태되거나 시대에 편승하지 못하였다. 이들과

다른 인간인 현대의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기 위해서 계속 변화하고

발전하라는 가스라이팅을 자신스스로와 사회에게 받고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변화라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부분이며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사용법은 맞출 수는 있지만 영혼까지는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점 소모되고 이 상황 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중국의 경우 취업난과 국가적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탕핑 세대니 가짜로 출근하는 시대니

40세만 되어도 기존의 직장에서는 자리를 잃고, 이직하거나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중국의 관객들은 매우 큰 감정을 느꼈으리라

짐작하는 바이다. 우리나라도 청년들의 암울함이나 쉬었음 청년들을 생각해 본다면

비슷한 경향이 있다. 이들은 막막한 취업시장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내면의

밀실이 아닌 현실의 밀실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1900처럼 산화할 것인가? 그를 통해서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는 현대의 인간이다. 인생은 길어졌고 나이가 몇이든

아직 세상에 내보내지 못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덧없는

희망일지라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래서 본인도 포기한 언젠가의 꿈을 끄집어내어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안다. 나의 시도는 서툴고 언젠가의 봄바람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희미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이런 글을 썼었다는 사실을 나만은

알고 있겠지. 그리고 운이 좋다면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투니와 악기점 주인장처럼 말이다. 더 운이 좋다면 언젠가 사회와 세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라고 구라를 쳐도 좋을 만큼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리고 좀 웃긴 이야기지만 나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유명한 인터넷 방송인으로 킹오브 파이터를

주력으로 삼는 유튜버 케X을(난 익명성을 존중하는 사람이다) 떠올렸다. 그가 커맨드를

잘못 입력하여 패배했을 때 나는 나는 장풍을 했다~ 라든가 승리요건을 채우고 도망가는

도전자에게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 등의 시그니쳐가 있는데 상당히 웃기기도 하지만 그 안에

느껴지는 뭔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의지와 다르게 현실은 장풍이 안 나가서 지고

끝까지 싸우고 싶어 하는 그와 달리 도망가는 도전자에게 농락당하며 지는 상황은 그의 리액션과

함께 큰 웃음을 준다. (내가 정신병자인가? 까지 생각했다)

굳이 이 글과 이어 생각해 보자면 현실은 나의 의지와 다르게 진행되고, 나를 농락하듯

상대조차 안 해줄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나는 장풍을 했다와 도망가지 마 맞서 싸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순수하고 정직한 인간적 외침이 아닐까?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뭔가를

만들고 그것이 내 뜻대로 안 되었을 때 이렇게 외칠 수도 있겠다

나는 나는 나는 문학을 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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