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생. 년. 월. 일. 시.
이런 것들로 내 인생이 이미 정해진 거라면,
왜 같은 날 태어난 사람도 다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무엇보다 난, 선생님이 말한 내 미래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모든 건 아가씨가 선택할 수 있어.
다만 당신의 사주를 분석했을 때,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을 바탕으로 풀이를 해주는 것뿐이지.
그럼, 이것과 다르게 운명이 흘러가게 할 수도 있는 거예요?
물론 가능하지.
아가씨가 마음을 평소와는 다르게 먹고 행동에 옮기는 순간, 운명은 또 다른 길을 보여주게 될 거야.
기다리던 소식
삼성역에서 강남역까지 걸어가는 것은 오래 걸리는 일은 아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늘 반대로 걸어가는 듯한 기분은 오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만 다르다.
이 시간, 내가 문득 어디로 향해 걷던,
아무도 나를 찾을 일 없는 그런 존재.
아니, 존재라고 할 수는 있을까?
-취업이 뭐라고 사람을 철학자로 만들어.
순간적으로 깊게 파고드는 정신을 부여잡고 주머니 속의 교통카드를 확인한다.
-내가 믿을 것은, 너 하나뿐이구나.
(띡-)
역시, 누가 뭐래도 나는 집을 가장 좋아하는 집순이.
탈출하고 싶지 않다.
-정말?
(모르겠다.)
-지이잉
반갑다.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
"네."
"아, 고우리 씨 핸드폰 맞나요?"
"네, 전데요."
이미 심장이 반응한다.
"네, 조금 전 면접 보셨던 회사입니다. 채용이 결정되었으니, 출근하시면 되는데, 혹시 언제쯤부터 출근이 가능한가요?"
"아, 정말요? 정말인가요?"
"네에, 사장님이 꽤 맘에 들어하셔서, 결정이 빨리 나왔네요. 혹시 10월 1일 괜찮으신가요?"
"네네, 저는 아무 때나 괜찮습니다. 그때 꼭 가도록 하겠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에 뜀박질이 절로 나온다.
-뭐부터 해야 돼, 뭐부터 해야 되냐고!
당연히 엄마에게 먼저 전화해야지.
대한민국 만세!
합격취소
하루하루가 반짝반짝 빛난다는 건, 이런 날을 두고 만든 말인 것 같다.
한국의 가을 날씨는 무척이나 상쾌하고 밝기만 하다.
-마치 내 미래처럼.
키득 혼자 웃어도 본다.
하루 뒤, 아니 몇 시간 후면 나의 생활 패턴은 모두 바뀔 것이다.
이제 이 한가하기 그지없던 시간들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주 조금 아쉬움이 남는 것 같기도 하고.
-안녕, 내 평화로웠던 과거야.
옷장문을 열어 내일 입을 정장치마도 꺼냈다. 그리고 일어나면 바로 보이는 장소에 걸어둔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올라왔다고 하지만 사실은 직접 축하해 주고 싶었을 엄마의 기대이자 선물이었다.
-앞으로 열심히 입어줄께.
출근을 앞두자 문득 오래도록 방치해 둔 메일함도 떠오른다.
먼지가 앉은 키보드를 끌어 읽지 않은 이메일을 하나씩 삭제해 나가기 시작한다.
(음.?)
눈에 익은 단어가 하나 있다.
아니다,
눈에 익지 않은 단어도 붙어 있다.
합격취소
-왜 이런 제목의 메일이 있을까?
클릭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반응한다.
안녕하세요. 당사의 사정으로 인해 귀하의 채용이 취소되었음을 통지드립니다.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에 다시 좋은 인연으로 찾아뵙길 희망하겠습니다.
메일을 내린다.
메일을 연다.
눈을 비비고 다시 천천히 읽는다.
분명히 취소라는 단어가 보인다.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한다.
나는 또, 새로운 문 앞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꼭 닫힌 문.
그런데 이번엔.
상당히 어둡다. 모든 것이.
그리고 분명,
잠겨있다.
-나에게 이럴 순 없어. 이러면 안 돼요.
나는 이제 문을 부숴버려야 한다.
출근하겠습니다.
밤새 잠을 설쳤지만, 피곤은 느낄 수 없다.
나의 두 눈도 그 어느 때보다 초롱 할 것이라 장담한다.
나는 면접을 봤던 그 장소. 그 문 앞에 서 있다.
같은 떨림이지만,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다.
하나 둘 출근하는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고, 한 번씩 흘긋 대는 시선이 멈추긴 하지만,
누구 하나 말을 걸진 않는다.
그때,
"저, 누구..?"
침묵을 깨고 말을 걸어오는 그는,
사장과 최종면접을 진행 중이던 나에게 커피를 가져다준 남직원이다.
"어, 그때 면접보시던 분이네요? 오늘부터 출근이세요? 실장님 불러드릴게요, 잠시만요"
"아, 저 그건 아니고.."
하는데 이미 그는 사무실 안 쪽으로 들어가 버린다.
-모르겠다, 나도 이제.
잠시 후 엠자형 넓은 이마가 눈에 띄는, 하지만 인상은 선해 보이는 한 남자분이 그와 함께 밖으로 나온다. 그의 표정에서 바로 당혹스러움을 읽을 수 있다.
"어? 아, 김대리 고마워요 들어가 보세요. 아 고우리 씨 아닌가요? 저희가 메일로 이미 통지드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안녕하세요. 네, 맞습니다. 메일 받았습니다."
-아, 못 봤다고 할걸 그랬나.
"네에.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이신지?"
입술은 바짝 마르고 괜히 팔 주변도 간지러운 것 같다.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한 후,
"저, 출근. 해야 합니다."
"네? 하하.."
입모양은 웃지만 눈은 불편하게 찡그린 그 표정, 전형적인 아무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의 표정이다.
시작은 이유나 물어보자 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곳 직원들의 출근하는 모습을 훔쳐보다 보니,
나도 매일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은, 저희도 당황스럽습니다. 그만두기로 했던 직원이 다시 남아있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서... 쯧. 그래서 충원하려던 팀의 티오가 갑자기 없어지게 됐어요. 죄송합니다. 그만 돌아가셔야겠는데요."
사정이 있으시죠? 저는 더 급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저예요.
"안 돼요."
"네?"
"사장님이라도 뵙고 가게 해주세요."
"사장님은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죄송합니다."
엠자머리가 마무리하려 한다.
이대로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지려 한다.
나는 다 했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는가?
계획 같은 건 애초에 없었어.
그래도 말해야 해.
-뭘?
(네가 할 수 있는 말! 해야 할 말!)
"돈은 안 받겠습니다."
"네에?"
"저 급여받지 않겠습니다. 한 달은요. 제가 일하는 걸 보고 가치 있다 생각되시면, 그때 책정해 주셔도 됩니다. 아니, 그때 나오지 말라하시면 안 나오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더 고려해 주세요."
담당자가 아니다.
책임자도 아니다.
팀장도. 사장도 아니다.
지금은 안다. 결정 권한이 없는 대행자의 역할이라는 걸.
하지만 몰랐다.
그때는. 아무것도.
"제발요.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인 김에 허리도 함께 숙인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허리를 들지 않을 거야.
"하.. 이것 참.. 그럼,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지금 충원하려던 팀의 팀장이 외근 중이어서요, 제가 전화로 한번 물어볼게요. 기다려보시겠어요?"
그래도 이번엔 진짜 미소를 보여준다.
"네, 네. 기다리겠습니다. 편하게 하세요."
누가 말했지?
사람이 가장 기다리기 힘들어하는 시간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아니, 그 사람은 이런 시간을 겪어보지 못했어.
채용을 기다리는 시간만큼 힘든 시간은 없어.
십 분도 채 안 된 것 같다.
그분이 돌아와 주었다.
할렐루야.
"하하하.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요. 뭐 일단, 팀장이 직접 한번 보겠다고 하니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시죠. 아마 오후 늦게나 도착할지 싶어서요."
빗장이 열렸는가.
소리가 들렸는가.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 번도 꾸벅댄다.
합격이라는 말이 아님을 알지만 나는 이대로도 이미 충분한 것만 같다.
몇 개의 파티션을 지나쳐 가장 안쪽까지 들어가 멈춰 선 자리에는,
짧은 머리의 남직원 하나가 정신없이 모니터를 보면서 서류에도 무언가를 급하게 적고 있다.
"오늘은 임시니까 일단 여기 앉아서 조금 기다리세요."
다시 나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주고는 돌아서는 틈에 큰 숨을 내쉬는 게 보인다.
구원자.
나는 휴대폰을 책상에, 아주 작은 소리라도 일으킬 새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옆자리 남직원에게 작게 속삭이듯 말한다.
"저기... 안녕하세요. 프린트. 라도 해드릴 게 있을까요?"
(깜짝)
어깨가 들썩일 만큼 놀랄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누.. 누구세요?"
"저, 고우리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씨익-
그 후로 25년, 아직도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나의 첫 업무가 시작되는 자리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