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되는 말

하룻밤 동침

by 아는개산책

'따뜻한 말 한마디'


오래전 우연히 보았던 드라마의 제목.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생각했다.


나도 그런 따뜻한 말 한마디가 있었으면,

조금은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안전함 보다는 불행이 늘 가까운 기분.

나는 몹시 불안정한 사람이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나는 깊은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같이 잘래요?


비행기 탑승 직전 화장실 안, 거울 속의 화장기 없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오늘. 옆에 훈남이라도 앉으면 어쩌려고.


그 짧은 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까지 돌려본다.

열 시간 넘게 달리려면 그런 희망이라도 있어야 힘이 난다.


하지만 현실은. 타자마자 기절.

곧, 착 기내 방송에 퍼뜩 눈을 뜬다.


-벌써, 도착인가.


굳어버린 몸을 조금씩 깨우며 좁은 창을 열어본다.

바깥엔 자욱한 안개가 낮게 깔려 지상으로 온 건지 지하에 도착 한 건지 분간이 안된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그래, 내인생에 무슨 드라마야.


함부로 꿈꾸면 안 된다.

드라마는 로맨스만 있는 게 아니니까.


어깨에 한번 더 힘을 주어 가방을 고쳐 메고 국내선 방향으로 이동을 한다.

그때 공항 내 방송이 여러 번 반복되는 것이 귀에 들어온다.


'현재 공항 근처 안개로 인한 기상악화로 인해 일부 국내선 비행기는 결항. 내일 재도전하세요.'

너 것도 당첨.


(어엇, 안되는데.)


티켓을 확인한 나는 창구로 달려간다.


-회사 또 뭐라 해야 하나.

의도하든 하지 않든, 회사에 보고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피로가 두 배다.


일단 항공사 창구부터 가서 자초지종을 물어야 한다.


-내일 좌석이랑 호텔은 제공하는 거겠지?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창구엔 아이보리색 폴로티에 베이지색의 얇은 양모바지를 편하게 차려입은 한 여리한 여성분이 서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이미 엄마 나이쯤 돼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다.


-와, 얼굴에 고생이 없어 보이네.


하지만, 여자한테 반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주머니가 나 대신 먼저 컴플레인을 해서 뭐라도 받아내면 좋겠다. 싶어 뒤로 줄을 서보는데,

아주머니는 이미 대화를 마친 듯 나보고 먼저 하라는 손짓을 한다.


-저, 저부터요?


창구엔 키 큰 항공사 직원 두 명이 '꼬마 한 명쯤이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자, 나도 최대한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본다.


"너희 내일은 뜨니? 오늘은 정말 안되니?"

"미안해, 날씨 때문에 오늘은 안돼. 내일 아침 비행기 있으니까 그거타."

"당연히 공짜지?"

"그래 그건 별도 비용 없어"


"호텔도 제공해 줘."

찡그렸던 인상은 어느새 애원의 표정으로 바뀌어 있다.


"방침상 그건 불가능해. 날씨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공항에서 기다려도 되고, 밖으로 나가서 자고 와도 돼."


한번 더 어거지로라도 호텔비를 받아낼까 하는데 아주머니가 내 옆을 계속 떠나지 않고 있는 게 자꾸 눈에 밟힌다.


"읍-하..."

일단 심호흡을 하고, 팀장에게 보고부터 하기로 한다.


"어, 넌 왜 또"

(또가 아니라 처음인데.)


"네, 저 엘에이 가는 편에 비행기가 샌프란 경유하는데 여기 날씨 때문에 오늘 전부 결항 됐어요."

"그래서"


"그래서 내일 비행기 타라는데.."

"아 나더러 어쩌라고, 알아서 해"


분명 통화 중인데도 자꾸만 고개가 숙여진다.


"네, 그럼 자고 내일 아침 비행기 타고 가겠습니다"

"그러시든지요. 너 근데 왜 엘에이 가는데 경유하는 걸 탔냐?"

"네?"

"아니다, 알았다, 끊어"

뚝-


"저, 그럼 하루 숙박비 더 나오는..."

-끊겼네.


-휴...

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아까의 그 아주머니는 아직도 나를 보고 있다.

이번엔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뭐 도와드려야 하나? 영어가 안되시나?

눈을 끔뻑거리며 마주 본다.


"저기, 실례가 안 되면 학생 오늘 나랑 같이 잘래요? 나도 내일 비행기로 가야 해서."


옥 하나가 바닥에 톡 떨어져 도르르 굴러가면 이런 소리일까?


-'같이 자자'는 소리가 엄청 우아하게 들리네.


나는 쫄레 쫄레 아주머니를 따라 공항 밖으로 나가본다. 마치 정말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두 손으로 가방끈을 꼭 잡고.



안개 속 호텔


우리는 함께 택시를 타고 짙은 안개 속을 달려 한 호텔에 도착했다.

택시 안에선 아무런 말도 떠돌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엔 자주 오시는 건가.

익숙한 듯 거리낌 없이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아주머니를 보고 잠시 그런 생각이 든다.


"저, 방값은 같이 반반 부담하겠습니다."

나도 낯짝은 있어 냉큼 말을 꺼낸다.


"후훗, 그러세요."

아주머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대답한다.


-괜찮다고 할 줄 알았더니...


아주머니 뒤만 보며 따라간 방은, 거실이 따로 있는 생각보다 꽤 넓은 방이다.


바로 앞에 침대 하나, 원목의 티테이블을 사이로 등받이가 높고 긴 엔틱형의 의자 두 개, 그리고 안쪽에 방이 하나 더 있는데, 거기도 침대가 있겠지. 더 큰 침대가.


"저는 여기서 잘게요, 저, 선생님이 안에서 주무세요."

언제부터 선생님이 되었다.


"고마워요. 아가씨.. 아가씨라 불러도 될까요? 아가씨가 먼저 씻을래요?"


아가씨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 아니요 먼저 씻으세요. 전 안 씻어도 돼요. 이따 자기 전에 씻어도 되고요."


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들고 안으로 향하는 아주.. 선생님.

공기 속을 걷는 듯 발걸음도 우아하다.


-어떻게 사람한테 저런 느낌이 날까?


거실을 두리번거리다가 별도의 문이 없는 안쪽 방까지 들어가 본다.


-문이 없으니까. 들어가도. 되겠지?

자꾸만 조심스러워진다.


TV 선반 위에는 옷이 가지런히 접혀 한층 한층 놓여 있다. 속옷부터 입고 있던 아이보리 폴라티까지 모두 동일한 브랜드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역시 정갈히 올려놓은 작은 크기의 화장품들. 스킨부터 에센스, 이름 모를 단계가 적힌 화장품들은 역시 한 브랜드로 통일되어 있다.


-공항에서 맨날 보는 이름이네. 역시 부자인 건가.


(어?)

물이 끊기는 소리가 나고, 나는 괜히 화들짝 놀라며 거실로 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이야기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모습도.


-나는 왜 아줌마한테 반하고 있냐고.

혼자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가씨, 심심한데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릴까요?"


"네? 네, "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다.


아니, 이야기라면 뭐든 좋아요.


"대치동에 00 아파트라고 알아요? 난 거기서 태어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전문직 특성상 항상 바쁘셨고, 나는 유모 손에서, 그녀의 시선과 보살핌으로 세상을 보고 배운 거나 마찬가지죠. 욕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꿈도 딱히 없었어요. 그저, 그냥 잘 자라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죠."


-그런 삶도 있구나. 계좌에 잔고를 확인할 필요도 없는 삶...


"경제관념도 없고, 세상물정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은 다 부모님처럼 나에게 다정하기만 하고 좋은 얘기만 해주더라고요."


-이미 재미있네요. 극과 극 체험.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 고운 테의 커피잔을 들어 홀짝 거린다.


"집 안에 커다란 피아노가 하나 있어서, 유모와 피아노를 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피아노만 치는 사람이 되어있더라고요. 피아노가 전부이고 음악이 세계가 돼버린, 더 안으로 갇혀 버린 삶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 같아요."


"네? 하하하. 아가씨도 재미있는 사람이죠? 훗."


-선생님은 예쁜 사람이고.


"그러다 내게도 한 남자가 오더라고요. 부모님이 소개해준 사람이었지만,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나도 순리대로 결혼이란 걸 했죠. 인생에 걸림돌이라는 게 무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아가씨가 된 사람은 사랑도 어려울 게 없더라고요. 드라마나 책에 나오는 사랑이야기처럼 우울하고 힘든 감정이 뭔지. 알 새도 없었어요."


-윽.

아직 첫사랑과의 이별이 채 아물지 않은 내겐 아픈 단어다.

사랑.


-이별이란 걸, 그래서 고통이라는 걸. 모를 수도 있구나. 그런 삶도 있구나. 이런 게 상위 1프로 아닐까.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또 예쁜 아이를 낳았어요. 부모님도, 알고 지내는 모든 분들이 축하하고 축복하는 탄생이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이가 말을 하지 않더라고요."


그 순간, 땅만 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고개를 들어 아주머니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젖고 있어...


"훗...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게 누구의 잘못일까. 나는 몰라요. 그것도 다 하늘의 뜻인 거겠죠. 아무 이유 없이 내 손에 쥐어진 모든 것들처럼. 나는 고통을 이겨내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그래서... 쉽게 무너져 버리더라고요. 정신도. 육체도."


"선생님..."

함부로 나설 이야기가 아니다.


"고통에 주저앉아만 있는 내게 사람들은 계속 얘기해요, 괜찮아질 거야. 조금 더 자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땐 그 말이 너무 웃긴 거 있죠. 괜찮아지지 않아도, 앞으로 평생 말을 못 한다 해도, 나는 이 아이와 살아야 하는데? 훗"


두리번거리며 티슈를 찾아본다.


"저, 괜찮아요."

그녀는 오히려 미소를 보인다.

흐르지 않는 눈물이 반짝이는 채로.


"나는 그냥 하루를 살았어요. 웃다가. 울다가. 이 아이를 데리고... 나쁜 생각까지 하기도 했다가. 우는 날이 더 많았을까요, 웃는 날이 더 많았을까요?"


아주머니가 참고 있는 고단했던 눈물은 내 눈에서 흐르고 있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


"답은. '웃는 날이 더 많았다' 예요. 아이가 이뻤어. 사랑스러웠어. 주변의 시선이 뭐라 해도 나는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을 멈출 수 없었어. 아니, 가장 무서운 건 내 안의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 아이를 싫어하게 될까 봐 두렵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결국은 사랑이 이겨냈어요. 물론, 그만큼 함께 해준 부모님과 남편의 도움도 컸지요."


소리를 내면 안 된다.

나는 흐르는 코를 그저 티슈로 조용히 닦아 냈다.


"아이가 나에게 온건 이유가 있을 거예요. 세상에 사랑받지 못할 아이는 없잖아요?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오히려 자라게 했어요. 그때부터 나는 어른이 된 거 같아. 틀리고. 다시 시도하고. 참고. 다시 껴안고. 그러면서 세상 모든 이야기들도 이제야 읽히는 그런 기분.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도 주변에서는 보이는 대로만 나와 아이를 바라볼 뿐이라는 것. 그럼에도 내가 지켜야 할 것들. 보호받아야 할 나의 아이와 그리고 내 마음. 세상에 어떤 것도 하찮게 보면 안 된다는. 세상의 그 이치."


-나도 아줌마를 보이는 대로 봤어. 우아하고 부드러운 진짜 어른 같은 느낌. 그 모습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어때, 재미없는 어른의 얘기, 요즘은 꼰대라고 하나요? 후후"


"아니요, 아니요. 저는..."


힘들었어요.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게 걸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일도 사랑도, 사람 간의 관계도. 나에게만 엉킨 실타래가 끊임없이 주어진다고...

그런데 왜.

아줌마 같은 사람도...


"나는 아가씨가 부러워요.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생기. 발그레한 볼에서 느껴지는 따뜻함. 옴짝 달짝 못하는 입술에서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미소 짓는다.

저렇게 미소 짓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나는 그저 고개만 절레절레 저으며 힘들게 미소 지었다.



다시 나의 인생


오전 이른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택시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여전히 호들갑스럽게 가방을 메고 잔돈을 쥐어든다.


-아직 안개가 다 걷히지도 않았네.


하지만, 오늘은 안개보다는 세찬 바람이 쉴 새 없이 머리카락을 흩뜨린다.


-비행기가 떠야 할 텐데.


걱정을 하며 입구에서 주머니를 뒤적인다.


반으로 접힌 티켓과 쪽지 한 장.


'우리 앞으로 또 연락할 수 있으면 해요. 내 연락처예요. 언제든 난 좋으니까'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이름과 연락처를 한 자 한 자 적어주었다.


-어제 제대로 못 봤는데,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까 혹시 모르니.


한 손에 티켓을 쥐고 다시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를 여는데, 다시 한번 거센 바람이 불어 얼굴을 때린다.


-웩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쪽지 한 장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바닥에 떨어진다.


"아고"


쪽지를 주우려 허리를 숙이는데 낯익은 이름 세 글자가 보인다.


(어?)


그리고 다시 부는 샌프란시스코의 그 바람.

종이가 펄럭이다 바람을 타버린다.


"아, 안돼!"


나는 쪽지를 잡으려 뒤늦게 손을 저어 보지만, 이미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기억을 되짚는다.


그 이름.

분명 나였어.


"우린, 분명 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이예요. 난 아가씨를 믿어."


그녀의 마지막 말이 마음 안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끝.)

이전 10화헤어진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