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이유

카르마

by 아는개산책

정말 시간을 되돌릴 순 없을까.

아니면, 되돌렸지만 기억을 못 하는 걸까.


내가 꼭 붙잡아야 했던 젊은 날의 한 순간.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모든 남은 미래가 슬픔이어도 좋아.

라고 생각했던 그런 날이.

내게도 분명히 있었다.



헤어지던 날


낮은 돌담이 파란 잔디를 둘러싼 채 벤치 몇 개가 불규칙하게 놓여 있는 이곳은 회사 건물 안에 위치한 휴게터, 즉 담배와 커피, 그리고 잡담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지만, 건너편의 꺼지지 않은 불빛에 더해 벤치옆 작은 등까지 켜지자 서로의 얼굴에 난 점 하나까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환하기만 하다.


아니. 서로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잘못했다."

그가 무릎을 꿇는다.


이 순간만큼은 말 한마디도 작은 행동 하나도 신들린 가위가 휘둘리듯 서로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긴채 무너져 내린다.


"너 잘못 없어. 내가 변한 거야."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입술을 깨문다.


(미안해.)


"아니야, 너를 변하게 한 건 모두 내 잘못이야. 내가 너무 몰라서. 널 힘들게 했어."

무릎 위로 굵은 눈물이 투두둑 떨어지며 넓은 그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이제 그만 가. 난 더 할 말 없어."

떨리는 목소리를 한번 더 감춰본다.


"제발..."


(너 계속 이러면 나. 슬퍼 죽어.)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제발..."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애원하는 그의 목소리.

차라리 그대로 땅에 박혀버리지, 굳이 나에게까지 전해져 온다.


(미안해.)


나는 제발이라는 그의 마지막 말을 내 마음 깊숙이 삼킨채 자리에서 일어나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잘 가. 조심히.)


그 겨울은 기어이 내 심장의 반쪽을 뜯어내어 어둠 속으로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뫼비우스의 띠


생명이 움트는 봄이라 그런가, 온 세상이 푸르름에 들떠버리는 여름이라 그런가.

봄과 여름을 무사히 보내놓고는, 마지막 가을의 문턱 앞에서 다시 무너져 버리는 나의 시간.

벌써 그 없이 맞는 두 번째 가을인데도.


뒤늦게 찾아온 이별의 고통은 서럽고 아쉽고, 매일이 신기루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다.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것 같은 무의미한 날들.


어느 날은 견뎌내지만, 어느 날은 그저 의식의 흐름을 쫓아간다. 심장이 뜨겁다 못해 녹아내린다 하더라도.


"과장님,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양팔사이로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니 낯선 얼굴의 직원, 유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쳐다보고 있다.


-아까 켜져 있던 컴퓨터가 이 직원 거였나 보네.


"이제 퇴근?"

굳이 대답할 이유가 없어 되묻는 질문을 던진다.


"아니요, 담배 한 대 피우고 와서 더 하려고요.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신입직원 특유의 씩씩한 말투. 그리고 내 얼굴도 찾을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맑은 두 눈.

한 손에 들고 있는 담뱃갑이 그의 발길을 정해놓고 있다.


"나도 같이 담배나 피우지 뭐."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농을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나 본다.


"네에? 과장님이요? 농담이시죠? 하하"


농을 던진 내가 멋쩍지 않게 해 주려는 웃음이다.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안다.


앞장선 그의 뒤를 따라 한 계단 씩. 물을 잔뜩 머금은 것 같은 발걸음으로도 천천히 딛고 올라간다.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지만, 옥상이 바람 쐬기 정말 좋더라고요. 의외로 윗분들도 잘 안 오고."


"호오."


-원래는 내 아지트인데.


다들 한 층 아래의 휴게터는 많이 가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서 계단까지 더 밟아야 하는 옥상은 잘 올라오지 않는다.


그가 옥상 문을 으차 하고 열자 틈 사이로 이미 벤치에 앉아 담배 한 대 물고 있는 무가 보인다.


-쟤도 신입... 난리 났구만 아주.



시간을 되돌려줘


"정말 담배 한 대 드려요?"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유가 담배 한 개비를 내민다.

도 별 저항 없이 손을 내밀어 엄지와 검지로 살짝 쥐고는 날씬한 그것을 요리조리 살펴본다.


"마음속 얘기를 태우는 데는 역시 담배밖에 없는 건가?"


"과장님, 괴로운 일 있죠?"

보고도 말이없던 무가 무심한 표정으로 툭 던진다.


나는 그저 시선을 옮겨 그의 눈빛을 바라본다.


-이 자식도 투명하네.


"되돌리고 싶은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죠."


들을 준비도 안되어있는 내게,는 역시 담담한 말투로 하지만 꿰뚫고 있다는 눈빛으로 얘길 한다.


"벌써 골백번은 다녀왔다고요. 과장님이 원하는 그 순간."

무가 잊지 말라는 듯 다시 받아친다.


"너네 뭐 하냐."

경계의 눈빛으로 돌변한 내가 되물었다.


-누구한테 들었지? 아니. 그럴 리가.


"왜 계속 달려가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지 알아요?"

왁스로 깔끔히 정리된 헤어만큼이나 거침없이 말하는 무.


"무, 말조심 좀 해."


"정작 말조심해야 할 건, 유. 너일 텐데."


시답잖은 말들에 대꾸할 기운도 없다.

그저 무가 앉은 벤치에 나도 털썩 걸터앉아 다리를 들어본다.


"과장님이 안 바뀌니까."


고개 숙여 땅만 본다.


"진짜 신이 기회를 줘서 그 순간을 주어 담는다 해도, 과장님은 또 헤어지게 되어있어요."


이번엔 한 팔을 뒤로 두고 기대어 고개를 든다.

밤하늘은 언제 봐도 예쁘다.

내 눈엔 별이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 숨어서 날 보고 있겠지.


"그렇게 돼야만 해서도 있지만, 과장님이 그런 사람인 거예요. 그러니 수백 번을 되돌려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지."


"그래. 그런가 보다."

하늘만 보며 무심히 대답한다.


(무)"그런데, 왜... 헤어지기로 한 건지는 물어도 돼요?"


(유)"넌 알면서 뭘 물어"


(무)"마음 얘긴 모르잖아."


"사이가 너무 좋으니까."

잠시의 틈에 내가 끼어든다.


"그건 우리도 알고."

끝을 기다리지도 않고 무가 말한다.


"나랑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걔는 죽을 수도 있대. 어머님이 절에서 사주 보신 걸 얘기해 주시더라. 이제, 전 남친 어머님이지."


유는 휴지통으로 가 담배꽁초를 버리고는 한숨을 크게 쉬며 하늘을 본다.


"죽는다는 건 그렇고. 어떤 상징적인 단어였겠지."


후- 무의 입에서 나온 담배연기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고 있다.



헤어진 이유


"그럼 내가 죽어버려야겠네. 되돌리지 못할 거면."


유가 놀라 나를 보는 사이 무는 헛웃음을 터트린다.


"역시. 인간들이란 하지도 못할 걸 잘도 떠들고, 알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 그래서 재미있단 말이야"


키득거리는 무가 얄미우면서도,


-저게 언제부터 반말을.

밉진 않다.


"넌. 무슨. 그런. 인간답지 않은. 말을. 하냐."

는 당황해서 기계적인 말투로 한 단어씩 끊어 얘기한다.


"하..."


그래, 맘껏 놀려라.

이런 게 선배라니.

한심해 보이기도 하겠다.

신입들 말에 휘둘리고나 있고.


"과장님, 그렇게 힘들다면 제가 진짜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너 드디어 미쳤구나. 또 무슨 벌을 받으려고"

유의 말에 계속 냉정한 흐름을 유지하던 무가 벌떡 일어난다.


-놀구들 있네.


난 둘을 번갈아 보다가 이번엔 내가 코웃음을 친다.


"귀엽냐...(늬들)"


"네. 귀여워요."


(?)


"여기"

하고 내민 그의 팔 안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눈처럼 새하얀 털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생명체, 새끼 고양이다.


"와! 웬 고양이? 내가 고양이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무는 이제 틀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고, 유는 안고 있던 고양이를 살포시 땅에 내려놓는다.


"왜, 왜 아니 그냥 나 주라고"

두 손을 뻗어 잡으려 한다.


땅에 놓이자 잠에서 깬 고양이가 엎어질 듯 말 듯 한걸음씩 나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 걸음은 곧, 네발의 엉금엉금... 같다.


'저건, 고양이야? 아기야?'


엉금엉금 힘겹게 기어 오는 것 같은 아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곤, 입을 떼고 싶어 옴짝 달짝한다.


시간이 멈췄다.

공기가 바뀐다.


"어, 어.."


"그 애를 만나야 한다고. 이구. 이제 우린 할 만큼 했다. 유, 너는 올라가서도 각오해야 할 거야."


소리 나는 곳을 뒤돌아 보았지만, 떠들던 그 둘도 담배도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져갔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기를 본다.


"넌..."


"어,,, 어..어마"


두 팔을 벌리고 아이를 기다리는 마음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그리움으로 가득찬다.


어디선가엔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은 그들의 목소리 들려온다.


(유) 더 단단해져야해요.

(무) 슬퍼 죽어? 인생?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했어.

(유) 할 수 있어요. 많은 연을 스쳐야해. 그래야 알게되는 것들이 있어요.

(무) 그래, 어쨌거나 아이아빠가 다르다구.


그들의 걱정섞인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흩어진다.


그리고.


상위에 엎드려있던 나의 얼굴엔 멈춰있던 눈물 한방울이. 조용히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젠. 정말 안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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