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정립 방법
제목에서 눈치채셨겠지만, 어릴 때 다들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엄마 아빠에게 혼나고 방문을 ‘쾅’ 닫고 내 방으로 들어갔는데, 방문 소리가 너무 커서 나도 놀라고 밖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며 “내가 한 거 아냐, 바람이 그런 거야”라고 말했던 적 말이죠.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에게 더 독설을 하게 되는 심리는 여러 개념이 합쳐진 현상인데, 저는 이것을 ‘정서적 안전성 기반 공격(Emotional Safety Aggression, ESA ; 프로이트 지그문트는 직접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상에게 치환(displacement)되어 나타난다고 설명했고, 현대 정신역동 이론을 일상적 관계 전반으로 확장해 제 나름으로 해석한 것입니다)’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 관계는 깨지지 않는다”라는 정서적 안전감이 전제되면, 사람은 통제 없이 감정을 배출합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느끼는 대상에게 가장 날카로운 말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 언어로 풀면 만만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안전하다고 느껴서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ESA를 겪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사실 가족보다 직장 생활에서 만나는 사람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가족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직장 동료들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고,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확신이 들고, 더욱이 큰 회사일수록 이 관계를 깨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다 보니 페르소나(사회적 가면)를 벗고 논리나 예의보다 감정의 즉시성이 앞에 놓이게 됩니다. 더욱이 투사(Projection), 즉 자기 안의 불안과 열등감, 좌절이 있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이 감정을 전가하려는 심리(방어기제)가 더 심해집니다. 특히 직접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채 안전한 대상에게 잔소리를 날립니다.
제가 아는 후배는 우리나라 부자 순위에 들어가는 회장님이 이끄는 선사(Shipping 회사)에 다니는데, 매일 부장님한테 잔소리를 듣습니다. 휴가를 간다고 뭐라고 하고, 연휴에 붙여 간다고 뭐라고 하고, 앞서 이야기한 내용이 다 들어가 있죠. 큰 회사니 퇴사가 힘들 거라는 확신이 만든 ESA의 대표적 사례입니다. 논리나 예의보다 "그냥 휴가 갑니다" 한마디에 발현되는 감정의 즉시성, 그리고 예전에는 부장님은 "여기서 쫓겨나면 안 된다"는 생존을 위한 불안, 좌절에 대한 투사까지 보입니다. 밝은 친구이고 다양한 취미로 즐겁게 사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다양한 취미를 가짐으로써 자신이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 다른 후배에게는 투사를 안 시키는 걸 보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장님에게는 "이 사람은 나를 이해해야 한다", "이 정도는 견뎌줘야 한다"라는 무의식적 요구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말의 수위를 높여도 관계가 유지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이런 것이 이해는 가능하지만 합리화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주변 사람이 이런 상태로 변하기 전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편안함의 단계 - 무례 단계 - 독설 단계 - 정서적 학대 단계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례 단계가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그 관계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본인이 무례한 건 아닌지, 또는 상대방이 나에게 무례하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말해야 합니다.
1단계: 편안함 단계 (Comfort Zone) 말이 솔직해지고 농담과 직설이 증가하지만 상처 줄 의도는 없습니다. "이 정도 말은 괜찮겠지"라며 필터가 느슨해진 수준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정도는 건강한 친밀성으로 봐야 합니다.
2단계: 무례 단계 (Boundary Erosion) 지적이 잦아지고 톤이 날카로워지며, 충고와 평가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너니까 말해주는 거야"로 시작되며 상대의 감정보다 내 감정 해소가 우선한 이야기가 많을 때입니다. 경계선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걱정을 해야 합니다.
3단계: 독설 단계 (Emotional Discharge) 감정 배출 목적의 말만 하고, 논리보다 공격이 앞서며 내 반응에 무감각해집니다. 스트레스받을 때만 유독 그 사람에게 거칠어지고 사과는 있지만 반복됩니다. 이 단계부터는 절대 참으면 안 됩니다.
4단계: 정서적 학대 단계 (Emotional Abuse) 반복적인 비하와 무시, 말로 통제하려 하며 죄책감보다 정당화가 앞섭니다. “부하직원(가족)인데 이 정도도 못 버텨?”라고 하며, 문제를 제기하면 "쟤는 왜 이렇게 예민해"라고 몰아붙입니다. 이 단계에 접어들면 관계 구조 자체가 위험입니다. 이제는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직장 내 갑질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일단 2단계 또는 3단계가 시작되면, 타이밍을 바꿔 말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핀잔이 나오는 순간에 바로 맞받아치면 90%는 싸움이 됩니다. 반격이 아니라 대화 조건 설정입니다. 시간이 바뀌면 의견이나 충고는 들을 수 있는데, 지금 표현 방식은 어렵다거나 대화가 자꾸 멈추게 된다고 고지합니다.
위의 방식이 안 통한다면 사실 → 영향 → 요청(Nonviolent Communication 구조)을 합니다. 예를 들어 “방금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사실) 제 의지가 바로 떨어졌습니다(영향). 죄송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피했으면 합니다(요청).”라고 공격 포인트가 없게 설명합니다.
만약 반복된다면 누적 패턴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런 식의 말이 반복될 때마다 난 거리를 두게 된다, 한두 번이 아니라 계속 같은 방식이어서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려야 합니다.
끝으로 대안 없는 비판은 즉시 중단 요청을 하십시오. 독설까지 가기 전에 반드시 대화의 규칙을 설명해야 합니다. 충고에 대한 대안을 물어야 합니다. 제가 잘하는 말인데, "아 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말이죠.
모든 관계는 상호적입니다. 문을 ‘쾅’ 닫고 나면 "바람 때문이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을 안 하면 상대방은 모릅니다. 엄마에게 또 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