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텐 (2007)

by cogus


산책은 어쩌면 내 지난 빚을 다 갚는 일



제트코스터 산책 (후미야가 후쿠하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산책이었다. 이런 건 중학생 때쯤 경험해 봤다면 더 신나게 즐겼을 텐데. 어른이 되고, 고등학교 졸업 사진을 다 불태울 만큼 어느덧 세상을 믿지 않게 되어서 이런 게 재미나 있을까 싶었다. 처음엔 빚을 갚는 노력이라 생각했고, 내 삶을 쥐고 있는 자의 장단을 적당히 맞춰주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1분도 안 되는 듯한 시간 속에서 나는 초반에 꽤 우왕좌왕했고 우스꽝스럽게 행동했다. 어쩐지 떨어지는 감을 맞거나 하는 재수 없는 일들이 유난히 나에게만 일어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도망칠수록 행운이 나에게서 멀어진다. 경험해 봐도 괜찮다고, 경험해 볼 걸, 이라는 생각은 제트코스터 한 바퀴가 다 끝나갈 무렵에 들었다. 되돌릴 수도 없지만 그런 걸 괜히 후회해 본다. 뒤로 걸으면 과거로 간다는데 돌아가볼까, 하다가 그냥 앞을 보고 잘 걸어가 보기로 한다.



가족의 모습 예시: 자식이 이방인이 되는 과정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경계선 너머> 속, 군인(국경경비대, 아들)은 자신을 버린 부모(콘스탄자인인 어머니와 토미스인인 아버지)를 원망하다가 어느 국적 안에 자신을 정의하는 걸 포기하고 규율 안의 자신의 삶을 맡기는 군인이 되기로 했다.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다는 믿음은 신념이 되어 그 누구도 믿지 않기로 한다. 먼 훗날, 부모를 다시 만난 날에도 그는 그들을 부모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일 속에서 ‘처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들이 부모이든 아니든 군인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는 오래전에 자신의 부모가 죽었다고 스스로 정의 내려왔다. 철저히 혼자 정립해 온 세상에는 아들만이 존재했다. 어떤 국적(부모)에도 포함되지 않고, 고립되어 자신의 나라를 만든 것이다. 그 나라가 설립되기까지 필요한 건 단 하나, 자신의 ‘쓸모’였는데, 그건, 직업정신을 넘어서 자신의 정체성이 되었다. 평생 이방인으로 남아있긴 그 누구든 싫은 법이다.

물론 이 희곡은 전쟁과 평화라는 주제에 대해 암시적으로 쓰인 글의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를 보며 후미야가 생각났다. 후미야는 이방인이던 시기에 다행히 후쿠하라라는, 좋은 어른을 만났다. 빚쟁이가 아버지의 역할을 해냈다는 게 기묘하지만, 그 누구든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자 국적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은, <경계선 너머> 속, 군인이 러바나와 아톰(부모)에게 하는 대사다.



(군인) 내가 어렸을 때 무슨 놀이를 좋아했는지 아세요? 공을 있는 힘껏, 아주 높이 차는 거였어요. 공은 언제나 다시 돌아오죠. 그땐 높은 곳 어디에서 누군가가 공을 나한테로 돌려보내줬다고 생각했죠. 나를 돌봐주는, 날 보호해 주는 사람이, 언제나, 언제까지나, 날 보호해 주는 사람이 말이에요. 하지만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요? 전쟁이 나에게 가르쳐준 게 뭔지?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무도. 규칙만 있을 뿐이에요. 규칙만. 규칙 때문에 내가 살아 있죠. 사람들이 날 없애버리려고 하고, 날 어떻게 못 해 안달 -

(러바나) 누가요?

(군인) 당신 쪽 사람들(러바나 가리키며), 그리고 당신 쪽 사람들(아톰 가리키며). 둘 다 날 죽여버리고 싶어 하지. 난 기다렸지. 기다렸어. 나는,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기다렸지. 따뜻한 온기 따윈 옆에 없었지. 차가운 짬밥만 먹어가면서 조용히, 조용히, 모든 규칙에 복종하면서. 숨죽이며 살았어.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온 나를 당신들이, 당신 둘이 내 성질을 돋우고 있어. 자꾸만- 만져봐, 만져보라고.



가끔 아내랑 일요일밤 마지막 버스를 탔다 (후쿠하라의 독백)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벌고 쓸쓸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가 있었다. 나는 변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어느새 변해 있었다. 세월이 변하게 한 건지, 무엇 때문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아서 엄한 데 분을 풀 때가 잦았다. 버스 안에서 잠깐 잠들었을 때, 짜증 내는 일 없을 테니, 나를 흔들어 깨워 줬으면 싶었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먼저 버스에서 내렸고, 나는 우산 쓴 그녀를 버스에서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잘 가라고 손짓했다. 슬펐지만, 나는 우산을 가지고 있던 쪽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탄 건 마지막 버스였고, 내려서는 집에 가는 길을 고민해야만 했다. 동시에 다른 것들도 오래 고민해봐야 할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쓸쓸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가 죽고 나서 깨달았다. 나도 꽤 많이 변해버렸다는 걸. 세월 때문인지 변한 그녀 때문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내가 한 짓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아서, 그녀를 눕혀두고 익숙한 길을 무작정 걷기로 했다.

세상에 딱히 미련 없어 보이는 이 녀석에게, “너는 나 젊었을 때랑 비슷해.” 어쩐지 그런 말이 잘 안 나왔다. 자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후회가 없었을까 돌이켜보다가, 이 녀석 사정도 참 귀찮게 생겼다는 걸 알게 됐다. 역시 자식을 두는 건 귀찮다. 삶을 하나 더 돌봐야 한다니. 아내와 둘이 오순도순 걷는 거리가 더 즐거웠을 것 같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후쿠하라의 음악 취향)


라벨의 음악이지. 좋은 음악이야. 너도 이리 와서 같이 감상하자고. 라벨은, 이 음악을 만들 때 말이야, 엄청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려고 하진 않았어. 그 작자는, 그냥 이 곡이, “죽은 왕녀를 위해 춤을 추는 우아한 환상”이라고 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실은 나도 그래. 죽어버린 왕녀를 위해 춤을 춘다니.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어. 음악은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음악은 하늘 위로 올라가니까. 확실히 춤이나 카레 맛 같은 건, 이미 죽은 사람은 못 느낄 거야. 근데 이승에 있는 사람이 카레를 먹고 나서 음악을 연주하는 건 다르지. 그 연주를 위에서 듣고 카레 맛을 느끼는 거야. 귀로 카레 맛을 느끼다니, 상상이 안 되는군. 내 아내는 오교치를 느끼려는 쪽이었을 테지만 말이야. 상큼한 레몬 맛을 좋아했거든. 어쨌든 이제는 가 봐야겠어. 음악이 다 끝나가고 있고, 이 산책에는 목적지가 있으니까 말이야.


https://youtu.be/UIXe7H52UkA?si=A-myXhWu_R6kH7d_

라벨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연주자 조성진)




비 오는 날의 텐텐(산책)은 꽤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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